농부는 소를 버리고 역사는 풍경을 잃었다
농부는 소를 버리고 역사는 풍경을 잃었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5.25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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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기자의 생태풍자
김성식 생태전문기자
   중국 갑골문엔 쟁기그림이 있다. 힘 력(力)을 뜻하는 상형문자다. 그 시기는 사람의 노동력으로 농사짓던 때여서 쟁기질을 하려면 당연히 힘이 필요했기에 쟁기는 곧 힘의 상징이었다. 고대중국인들은 또 여럿이 힘을 합하는 것을 쟁기 3개로 표현했다.

이것이 훗날 '힘합할 협'자가 됐는데 발상이 기막히다. 쟁기 한둘보단 세 개로 땅을 갈면 훨씬 쉽게 일을 마칠 수 있었기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중국의 갑골문보다 앞선 이집트 상형문자에도 쟁기가 나타난다. 쟁기의 역사가 매우 오래됐음을 시사한다. 학자들은 이들 상형문자를 들어 서양에선 BC 4000년께, 동양에선 BC 3000년께 쟁기가 출현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쟁기의 출현은 농업발전사에서 가히 혁명적인 일이다. 나뭇가지나 타제석기 혹은 괭이와 따비로 농사 짓던 구문명에서 새로운 문명사회로 접어들게 한 일대 사건이다. 일부에선 쟁기를 원시자연사회서 문명사회로 전이케 한 상징물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선 어느 시기에 쟁기가 도입됐을까. 북한에선 평북 염주서 출토된 유물을 들어 BC700년께로 주장하나 남한에선 믿지 않는다. 대전 괴정동 출토 농경문(農耕紋) 청동기에 따비로 땅 가는 모습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경문이 그려진 그 시대(청동기시대)엔 아직 쟁기가 사용되지 않았고 다만 삼국유사 신라 유리왕조에 처음으로 쟁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들어 삼국시대로 보고 있다. 쟁기 이후의 또 다른 혁명은 소를 이용한 쟁기질, 이른바 우경법의 시작이다. 중국에선 BC 3세기경에 우리나라에선 신라 지증왕 3년(502년)에 우경이 시작됐다. 중국에선 이집트의 쟁기가 전래된 지 27세기여 만에, 우리나라에선 중국으로부터 쟁기가 들어온 지 4세기 만의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농업발전사의 판도가 뒤바뀌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경운기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다. 이상야릇한 기름냄새와 함께 덧─? 거리는 낯선 기계음이 1960년대 이후 우리 농촌에 울려퍼지면서부터 꿈에도 못 그리던 기계화 영농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후 불과 반세기만에 우리 농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웬만한 농가는 수천만원이 넘는 트랙터를 갖게 됐고 이앙기, 관리기 등 각종 농기계가 소와 사람을 대신하게 됐다. 우경법이 도입된 지 15세기 만에 우경 발상국을 능가하는 선진 기계화영농국이 됐다.

반면 변한 것들도 많다. 모내기철이 와도 들녘에선 풍악과 농요가 들리지 않고 여러 사람이 품앗이하는 모습도 사라졌다. 좁은 논두렁을 곡예하듯 밥광주리 이고 가던 시골 아낙의 애잔한 모습이 사라진 대신 자장면과 식당밥을 실어나르는 오토바이, 밥차가 시멘트포장 농로를 숨가쁘게 드나든다. 숭늉 대신 전화 한 통에 배달된 다방커피로 입가심하고 걸쭉한 막걸리 대신 PET병에 담겨진 생맥주로 농심을 달랜다.

모내기철 생태달력도 달라졌다. 기계화 영농으로 모내기철이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예전엔 보리이삭이 다 익을 즈음 모를 냈는데 지금은 보리밭이 푸르스름할 때 모내기를 한다. 무논 형태도 달라졌다. 예전보다 훨씬 작은 모를 기계로 심게 되면서 무논 깊이가 눈에 띄게 얕아졌다. 일년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문전옥답도 가치를 잃었다.

워낭소리와 함께 사라진 농부들의 소몰이 소리도 빛바랜 추억이 됐다. 해서 어느 시인은 우리농촌의 잃어버린 풍경을 이렇게 읊는다.

'새벽 안개에 쇠똥냄새 배어나면/할아버지는 삽작문을 나섰다/외양간에는 녹슨 쟁기, 소는 보이지 않는다/소는 외출 중/갈빗살과 차돌박이로 분류된 지 오래이다/농부는 소를 버렸고/소는 쟁기를, 역사는 풍경을 잃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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