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자 따로 있다
고통받는자 따로 있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2.15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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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한 덕 현 편집국장

요즘 대리운전 업계가 갑자기 호황이라고 한다. 장사가 잘 되는게 아니라 대리운전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급증한다는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든 자영업자나 샐러리맨, 대학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까지 밤마다 '투 잡'의 전선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증거다. 어쨌든 쥐꼬리만한 수입이나마 하루 하루 현찰을 만질 수 있으니 이만한 호구지책도 드물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새로 대리운전을 하겠다는 사람의 절반 정도가 주부라는 조사결과다. 경제한파에 가계수익은 줄어들고 든든하던 남편마저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판인지라 한푼이라도 벌겠다고 작심하고 나서고 있다. 이렇다보니 이를 놓칠세라 사회 기생충들도 덩달아 기승을 부린다. 취업사기와 유사금융, 다단계 사기에 번번히 걸려드는 건 주부들이다.

최근 서산경찰서에 의해 전모가 드러난 의료기기 다단계 사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친인척들의 쌈짓돈을 긁어 모은 것도 부족해 남편의 교통사고 사망보험금까지 쓸어 넣었다가 하루 아침에 거리로 나앉은 피해자들의 절규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없는 사람들의 한(恨)은 더 서럽다.

결국 내년도 예산안이 파행속에 통과됐다. 이번 예산안 확정이 여당의 주장대로 경제난 극복의 단초가 될지 아니면 야당의 예견대로 없는 사람들을 더 어렵게 만들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사상 최대의 감세를 몰고 올 예산 부수법안이 국회의장에 의해 무더기로 직권 상정돼 통과된 것은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해도 뒷골이 당긴다. 시쳇말로 세금도 가진게 있어야 낸다. 당초 정부의 감세 방안이 알려지면서 국회의 회기 내내 이른바 '감세 코드'가 정국을 휘둘렀지만 정작 서민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따져 볼 겨를조차 없었다. 이는 무관심이나 무지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 박탈감을 억제하려는 의도적인 외면이었다.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대까지 종부세를 환급받는다는 얘기는 땅 한뙈기 없는 서민들에겐 남의나라 얘기다.

이를 곱씹으면서 남들보다 가지지 못해 죄인일 수밖에 없는 옹색한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갑자기 대리운전대를 잡은 사람들이 한 달 내내 벌 수 있는 돈은 뻔하다. 졸지에 국가의 선처로 거액의 종부세를 되돌려 받는 사람들은 그 돈 없이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지만, 손님눈치보며 한 탕 잘 뛰어야 몇천원을 손에 쥐는 신규() 대리운전자들은 그 돈이 꼭 있어야 가족을 먹여 살린다. 이런 상황에서 조세형평을 입에 올린다면 이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1997년 IMF 사태가 우리나라에 남긴 가장 큰 상처는 빈부의 격차와 이로 인한 사회각계의 분열과 해체다.

졸부와 풍요롭게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본격 득세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의 영역을 분명히 갈라 놨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상처가 다시 덧나는 시련기를 맞고 있다.

오히려 그때보다도 더하다는 국민들의 우려는 그때보다도 더 벌어질 빈부 격차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지금 서울 강남은 외제차가 홍수를 이룬다고 한다. 자고 나면 새얼굴이 하나 둘씩 늘어나는 주택가 골목의 파지 줍는 노인들(최근엔 젊은층도 눈에 띈다), 역시 골목마다 진을 치기 시작한 포장마차, 급증하는 실업급여, 졸지에 새로운 트렌드가 된 무급 장기휴가와 조업단축, 빈발하는 생계 비관 자살, 임금삭감, 이런 어두운 잔상들이 절절하게 와 닿는 힘든 시절이 다시 왔다.

그러나 희망을 잃지 말자. 겨울은 때가 되면 반드시 봄에 밀려 난다. 좀더 화려한 봄맞이는 혹독한 추위가 앞서야 더 기대된다.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매서운 추위를 녹여 줄 서로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다. 이런 휴먼스토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해지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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