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돈
신앙=돈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9.02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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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김 상 수 신부 <청주시노인종합복지관>

세계 10대 교회에 한국의 교회가 5개나 포함된다는 기록이 기억납니다. 물론 세계 10대 교회의 선정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그리스도교 역사를 가진 서구 못지않게 팽창한 한국 사회의 복음화를 보면서 기뻐할 문제만이 아니라는 교회내의 자성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님을 압니다.

동양사상에 대한 여러 서적들을 뒤적이다 동양의 구도자들은 의무적으로 하루에 2시간30분을 참선(혹은 명상)에 바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루의 10분의 1을 신께 자신을 봉헌하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수도자들도 10분의 1, 혹은 그 이상을 묵상 및 기도 시간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교에서는 10분의 1을, 화폐가치로 환산한 십일조만 봉헌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짧은 시일동안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교회 첨탑이 한국의 밤하늘을 수놓고 교세는 증가일로에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물질로 충만해진 그리스도교는 세상에 대해서도 물질적 가치만으로 재단하고 폄하하려 합니다. 신의 축복을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방식으로 셈하려 합니다. 때로는 신앙이 돈 벌이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처럼 비쳐지기도 합니다.

융은 인간의 심리 기저에 신성한 것에 대한 성실하고 주의 깊은 관조로 명명되는 렐리기오(Religio)의 자세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정신의학적, 종교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학적인 관점에서도 신성한 것을 지향하는 인간의 욕구는 의식의 진보를 거듭하는 사회와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시 인간에서부터 시작된 애초의 신앙은 존재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과 두려움의 일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자연현상에 대한 두려움이 토테미즘을 통해 극복 되었고 집단적 토템 숭배문화는 오랫동안 인류를 지배했습니다.

한층 의식이 진보되었다는 오늘날 인류의 신앙은 기성종교로 분류되어 합법적인 방식의 종교행위로 정착 되었습니다. 모든 기성종교의 신은 공통적으로 인간에게 도덕 윤리적 측면에 대해 각성할 것을 경고 했습니다. 신의 실천적 가르침에 의해서 막연한 두려움에 대한 해방과 함께 비로소 인간의 권위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의 신앙행위는 아쉽지만 융이 말한 것처럼 렐리기오의 자세에서 기인한 신앙행위는 아닌 듯 합니다. 물질, 가난에 대한 두려움, 사회적 명예와 도태에 대한 두려움 등이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기도의 주요 목적인 것을 보면 비를 내려달라며 태양을 보고 울부짖던 원시인의 두려움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종교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심성이 한층 고양되어, 물신이 지배해버린 세계 전반의 파괴적 문화에 대해 반성적 사유를 할 수 없고, 높은 도덕성과 온전한 자기실현에 대한 렐리기오적 욕구를 발현할 수 없다면 우리의 신앙이 원시인의 토템숭배와 다를 게 무엇이겠습니까

성서에서 딱 한 번 예수님은 대노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한 2, 16). 예수님은 성전의 중심에 인간의 야망과 돈을 모셔놓은 우리에게 또 다시 대노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요한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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