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꽃
어머니의 꽃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4.02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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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신 종 석 <시인>

하루가 다르게 푸른 새싹들이 얼굴을 내미는 봄이다

서로 다투어 제 발에 맞는 초록 신발들을 찾아 신고 성큼 내 앞에 다가서는 봄은 희망의 상징이며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봄과 함께 늘 먼저 들려오는 꽃소식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언제부터인지 꽃들이 피어나는 시기가 되면 명치끝이 아리하게 아파오는 증상이 시작되었다.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나만의 속병이다.

우리 어머니는 꽃을 무척 좋아 하셨다. 늘 생활고에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시면서도 우리 집 화단은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지는 날이 별로 없었다. 앞뒤로 화단을 만들고 봉선화, 채송화, 맨드라미, 분꽃, 나팔꽃, 백일홍, 함박꽃, 붓꽃, 접시꽃, 창포, 족두리꽃 등 어디서 그 많은 꽃들을 구해다 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힘들고 지친 삶에서 잠시 잠깐씩 꽃을 보며 행복해 하신 것 같다.

시골집에서 홀로 계시던 여든이 넘으신 어머니는 꽃이 피어나는 봄이 되면 해소 천식에 늘 기침을 하시는 불편한 몸이면서도 커다란 보자기를 앞에 질끈 동여매고 산으로 들로 다니시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다니시다 보자기 가득 꽃 이파리만 잔뜩 따오시는 게 아닌가!

우리 가족들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봄나물을 캐신 게 아니라 웬 꽃잎만 따오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늘 꽃을 좋아 하시더니 치매에 걸리셨다고 생각을 하면서 걱정했다. 그러나 다른 행동에서는 별다른 증상이 없으므로 우리는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어머니는 꽃에 대한 집착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고 가끔 고향에 가면 어머니의 꽃잎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더 다양해졌다. 내가 "엄마 이 꽃들은 다 뭐 하려고 이렇게 자꾸 모아"하니까 백가지 꽃들을 모아야한단다 그것도 많이 모아야 한단다. 왜냐고 물으니까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환하게 웃기만 하신다.

그러기를 한 삼년 이제 시골집의 처마 밑은 꽃잎말린 자루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행복해 하셨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우리 집에 다니러 오셨다. 보따리에 이것저것 싸들고 아주 힘겨운 걸음을 하셨다. 어머니의 짐 속에 까만 포도 알만한 것들을 랩으로 하나하나 포장 해 반찬통으로 두 통을 내놓으셨다. 백가지 꽃으로 환을 만들어 먹으면 모든 병에 좋다고 하는 말을 어떤 분으로부터 듣고 삼년동안 백가지 꽃들을 따 모아 만든 것이라고 했다. 얼마나 화가 나고 속이 상하던지 쓸데없는 짓을 하셨다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머니는 몸에 좋다고 하니 꼭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 우리 집을 마지막으로 다녀가셨다.

나는 인증되지 않은 약을 함부로 먹을 수가 없어 모두 버리고 몇 알만 냉장고에 처박아두고 잊고 있었는데 오늘 냉장고 청소를 하다가 그 약을 발견한 것이다. 왈칵 치솟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식을 위해 정성을 다해 꽃잎을 따 모으신 어머니의 사랑을 외면한 내가 한스럽다. 마지막 주신 어머니의 사랑을 저버린 불효자식은 환약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백가지의 향기다. 아니, 어머니의 향기가 난다.

봄이 되면 나의 어머니는 백가지의 꽃들로 여기저기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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