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노래
봄노래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3.21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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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화의 문학칼럼
한 채 화 <문학평론가>

바람은 부드럽고 목련꽃 망울은 부풀 대로 부풀어 터지기 직전이다. 학교 앞 울타리에는 겨우내 잠들었던 개나리가 기지개를 켠다. 이 맘때면 바지에 줄을 잡고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새내기들이 물고기떼처럼 몰려다니며 교정의 예제를 기웃거린다. 만나는 사람들도 낯설고 교정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일 터이니 가슴 콩닥거리는 즐거움이 있을 터이다. 모두들 바르게 자리 잡아 상급생으로서 부족함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이맘때면 나는 학교에 대한 기억보다는 어린 시절 진달래와 문둥이에 대한 기억이 앞서니 아마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문둥이다"

한 마디면 혼비백산하여 뒷동산에서 고무신 찢어지는 줄도 모르고 집으로 내달리던 시절. 우리들은 진달래를 꺾어 먹기도 하고 사이다병에 꽂기도 하려고 산으로 몰려갔다. 그런 우리를 어른들은 놀리려고 한 말인지 아니면 함부로 산에 나다니지 말라며 경고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문둥이 이야기를 들려 주곤 했다. 즉 문둥이가 참꽃 뒤에 숨어 있다가 아이들이 참꽃을 꺾으러 오면 붙잡아 간을 빼먹는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우리들은 산에 오르기 전에 이미 겁에 질렸으며 산에 오르는 과정은 늘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때에 누구라도 '문둥이'라는 말만 하면 깜짝 놀랐다. 꺾어 먹은 진달래로 혓바닥이며 입가며 온 세상이 보랏빛으로 물들던 시절이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우리 동네에서는 문둥이에게 잡혀 간을 빼앗겼다는 아이는 없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벨텔의 편지를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

방과 후에 산골짜기를 흔들던 풍금소리와 함께 은은하게 들려오던 여선생님의 노랫소리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린 나는 이미 편지를 쓰는 벨텔이었으며, 수신자 로테가 받은 편지는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소리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봄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만물이 용솟음치듯 솟아나고 벨텔은 슬픈 사랑의 노래 속에 목숨을 바친다.

끊임없는 움직임이 땅속에서 일어나고 바람은 온화하다. 봄비로 천지는 나날이 풀빛을 더한다. 이제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산으로 가지 않고 승합차를 타고 학원으로 달려간다. 진달래로 입술을 물들이기보다는 색소로 물든 사탕을 빨아먹는다. 있지도 않은 문둥이 이야기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받아든 시험지 점수에 놀라는 것은 아닐까.

목련꽃 그늘에 앉아 빼곡하게 쓴 편지 읽는 소리를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결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애절하게 써내려간 편지를 꼭 들려주고 싶다. 그러고도 시간이 나면 뒷동산에 올라 진달래 꺾어 예쁜 병에 꽂아 이울지 않도록 키우고 싶다. '그것'이 아니라 '그들'로 아이들이 자라주었으면 참으로 좋겠다. 사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잊혀진 봄노래를 다시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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