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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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3.07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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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화의 문학칼럼
한 채 화 <문학평론가>

요즘 대형 영화관을 가보면 예전의 극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한편의 영화를 상영하던 과거에 비해 십여편 안팎의 영화를 상영하는 점이 다르다. 한편의 영화를 강요받던 때로부터 선택할 수 있는 때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영화관 건물에 모든 편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필요한 만큼 선택적으로 즐길 수 있다.

영화관에 가지 않는 사람들은 또한 어떠한가. 그들도 예외없이 영상 매체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서 저녁을 먹자마자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체루성 드라마에 눈물을 흘리고, 프로선수들의 화려한 플레이에 열광한다. 이렇듯 시각적인 인상을 많이 받는 텔레비전이나 영화는 감지(感知)와 상상(想像)의 콤비네이션이 작동된다고 할 수 있다. 글자들만 감지하고 주로 상상력이 작동되는 독서과정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로를 걷던 서점들 역시 문화의 종합 공간 기능을 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국민 l인당 독서량이 선진국에 비하여 턱없이 부족하다고들 말하지만 내 주변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게다가 학생들은 교과서만을 읽던 예전에 비해 다양한 내용과 형태의 책을 쉽게 구하여 즐긴다. 텔레비전이 나오면서 라디오는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여전히 라디오의 청취자가 텔레비전 시청자와 함께 동거하는 현상과 비슷하다.

이러한 오늘의 사회 현상을 독일어로 파르마콘(parmakon)이라 부른다. 이 말은 약과 독의 동거를 의미하는 것으로 독사에게 물린 사람을 위한 약은 독사의 독에서 구한다는 순환 논리이다. 독안에서 독을 제거하는 약을 뽑아내니 모순되는 논리인 듯하다. 이렇듯이 상반된 것이 동거하는 세상이다 보니 구심점이나 중심축을 찾을 수 없다. 궤도 안에서 궤도를 해체하고 초월하며 재구성한다.

그뿐만 아니라 작가들은 이제 독자들이 함부로 넘겨볼 수 없던 무대에서 내려왔다. 이제 그들은 청중석에서 독자들과 더불어 공동 창작을 한다. 요즘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패러디(aprody)는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패러디는 기존의 어떤 것에 대하여 흉내를 낸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착각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패러디는 창작과 비평이 동거하는 문학텍스트인 셈이다.

이런 바람은 우리의 가정에도 불어왔다. 아버지는 안방을 벗어나 거리에 있으며, 어머니는 주방을 떠나 공장의 기계 앞에 앉아 있다. 부모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학생들은 책상을 떠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전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에 혼돈이 일어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인은 국민을 볼모로 검은돈을 챙긴다 하고, 공무원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승용차를 타고 가서 부정한 짓을 일삼는단다. 시위대 앞자리에 선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는 슬며시 꽁무니를 빼기도 한단다.

헛기침 한 번으로 자식을 가르치고, 부엌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자식의 구겨진 교복을 매만지던 어머니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바람일까. 엄하게 가르치면서도 은근하게 자식을 사랑하신 아버지와 머리에 쓴 수건 속에서 꼬깃한 돈을 꺼내 자식의 손에 건네주시던 어머니의 자리가 그립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르면 어떤가. 모두들 제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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