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시간
그들의 시간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2.15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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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문학 칼럼
박 홍 규 <교사>

사진을 보고 있다. THE EARTH. 이탈리아에서 Cube Book 시리즈로 나온 사진책으로 500개가 넘는 컬러 사진이 담겨 있다. 사진은 모두 지구의 자연풍광을 보여준다. 그 중 오랫동안 눈길을 놓아주지 않는 장면이 있다.

이집트 시나이(Sinai). 바위와 자갈이 얼크러져 있는 황량한 계곡. 저 멀리까지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다. 맨 흙의 갈색과 메마른 회색이 전부다. 군데군데 뿌리내린 서너 포기 풀이 그나마 푸른색 점을 만들어낸다. 그 계곡에 시커멓게 타버린 나무둥치가 한 무더기 놓여있다. 나무 화석이다. 규화목이 나무처럼 쓰러져 있다. 그렇다면 이 황량한 계곡도 오래전 한 때는 울창한 숲이었을 터. 아름드리 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던 몇 천만년 전 원시림이 지금은 화석이 되어 검은 잔해로만 남아 있다.

몇백만 년, 몇천만 년. 그렇게 긴 시간 속에서 무엇이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사진이 보여주는 것처럼 변화는 시간의 길이만큼 극적이다. 그러나 변화가 아무리 극적이라 한들, 그 먼 옛날까지 거슬러 상상하며 지금과 비교해서 얼마나 달랐느니 고민하거나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지나치게 멀기 때문이다. 현재와의 연관성을 따지기에는 고리가 너무 희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변화라든가 시간의 길이를 우리는 아예 고민하지 않아도 될까

긴 시간만 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놓는 것은 아니다. 몇천 만년의 시간만 상전벽해를 토해놓는 것은 아니다. 단 몇 년, 그보다 짧은 시간만으로도 긴 세월의 격변을 능가하는 변이를 우리는 만들어놓고 있다. 무작정 변화를 거부할 일도 아니다. 다만 어떠한 변화인가를 살피는 일은 마땅히 시간의 길이를 묻는 일과 함께 우선되어야 한다. 무엇에 열중하고 있는지, 무엇에 열중해야하는지, 무엇을 더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지를 살피고 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연 방향을 잘 잡아가고 있는지 이리저리 앞과 뒤로 둘러보는 작업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의 길이를 백년쯤으로 작정하고 있다면 변화는 백 년 동안 일어난다. 느릿느릿 천천히 변화할 것이되, 따질 것 꼼꼼히 따지고 살필 것 넉넉하게 살필 여유는 충분하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자연은 변화에 적당한 시간의 길이를 몇만 년, 그 이상으로 잡아두고 있다. 에베레스트 산맥은 그 길이에 맞추어 우리가 알 수 없는 아주 느리고 느린 속도로 솟아오르고 있고, 태평양도 흔적도차 없을 정도로 천천히 줄어들고 있다.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 그것이 능사가 아니라면, 그래서 단위를 오년쯤으로 한다면 어떨까. 이럴 때 굳이 상상력이 필요할까 그 안에 변해야 한다. 생략과 압축은 필연이다. 무수한 과정과 절차와 배려와 참여는 쉽게 떨구어져 버린다. 수많은 정당한 주체는 외면당하고 무시당한다. 바쁘다는 한마디가 공용어가 되고 패스워드가 된다.

그들은 기어코 운하를 파고야 말 작정인 듯하다. 사진을 보며 비롯된 생각은 기어이 여기에까지 이른다. '그들'은 우리이기도 한 것인가 그보다 그들의 시간은, 그들이 따져놓는 시간의 길이는 과연 얼마쯤일까. 시간의 길이를 공유하려 하지 않는 그들은 결국 '그들'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그들이 짧게 나누어 놓은 시간은 그들에게만 적용되거나 그들에게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짧은 시간 동안 만들어 내는 격변은 또 우리의 삶을 얼마나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오년을 위해, 그 다음 이어질 오십년, 백년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얼마나 휘둘릴 것인가.

(책 : Alberto Bertolazzi. THE EARTH. 2004. White Star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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