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알렉산드로스 동방원정
<120>알렉산드로스 동방원정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1.29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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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덕의 오버 더 실크로드
33년의 짧은 生… 2300년 긴 여운으로

군사적 정복활동 동·서양 문명에 큰 파급

지구상에서 동·서양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군사적 정복활동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과 이슬람 군의 동·서정(東·西征), 몽골군의 서정(西征)을 들 수 있다.

기원전 334년 마케도니아를 출발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는 순식간에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석권하였다.

다음해(BC 331)초에 알렉산드로스는 나일강 하구에 첫 알렉산드리아시를 건설하였다.

그해 늦은 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아케메네스 왕조인 페르시아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이어 바빌론을 점령하고 수도 수사와 페르세폴리스를 함락시켰다.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는 허둥대며 박트리아 지방으로 달라나려 했지만 도리어 부하 베수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가 죽은 직후 에크바타나에 도착했다. 대왕은 죽은 적국 왕의 관에 향기로운 약초를 채우고 그 자신의 가운을 그 위에 덮고 정중하게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베수스는 알타크세르크세스 4세라고 자칭하며 박트리아의 주권을 쥐고 있었는데 급히 추격해 오는 그리스 군이 두려워 옥사스강을 건너 나우타카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부하들의 신뢰를 잃은 베수스는 자신의 친구 스피타메네스에게 붙잡혀 알렉산드로스 앞으로 연행되었다.

대왕은 그를 에크바타나로 보내어 아케메네스 왕조에 대한 배신자로서 페르시아인의 손으로 처형하도록 하였다.

원정군은 신속히 소그디아나에 진주하여 수도 마라칸다(현 우즈벡 싸마르칸트)를 점령했다. 계속해서 북상하여 시르다리아강 유역의 사카족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하여 북상하여 그곳에 또 하나의 알렉산드리아 시를 건설했다.

원정군은 저항하는 소그디아나인 3만 명을 학살했다. 특히 원정군에 회의를 품은 스피다메누스는 소그디아나인과 박트리아 주민들을 규합하여 저항을 하였고 제라프샨강 북쪽까지 추격한 원정군에 패하여 저항하다 토착민에게 살해됨으로써 소그디아나 지방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원정군은 이 추격전에서 12만 명의 현지인을 살해했다.

알렉산드로스는 1만 3천의 병사를 박트리아에 주둔시키고 그 자신은 주력부대를 이끌고 인도를 경략하기 위해 진군했다.

기원전 323년 33세 나이로 짧은 생 마감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세계의 끝인 투르케스탄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그리스인 식민을 이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옛 페르시아 왕의 지배권을 인정했던 지역은 당연히 자신의 제국에 다시 편입되어야 한다는 침탈논리를 내세워 인도 원정을 결심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갠지스강 유역까지 진격하기를 원했지만 5하(河)의 마지막 강에 이르러 8년간의 힘든 원정에 지쳐버린 병사들은 진격 명령을 거부하였다.

19개월간의 인도 점령을 마감한 원정군은 아라비아해를 통해 귀환하려고 인더스강을 따라 남하하였다. 그러나 라비 강변에서 10만 인도연합군의 저항을 받아 알렉산드로스는 중상을 입기까지 하였다.

기원전 323년초에 가까스로 수사를 거쳐 바빌론에 도착했지만 그해 6월 알렉산드로스는 갑자기 열병에 걸려 10일간의 병고 끝에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동방원정의 막을 내렸다.

알렉산드로스 도시망 통해 헬레니즘 발생

그후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한 대제국은 분열되지만 투르케스탄의 그리스계 정권은 그후에도 200여 년간 지속되고 특히 그 문화적 영향은 수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에서 아시아 전역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알렉산드로스 제국 곳곳에 건설된 알렉산드리아 도시 건설은 모두 교통의 요지에 건설되었으며 각종 기술과 공예에 뛰어난 많은 그리스인들이 생산과 교역에 힘쓰고 있었다.

이른바 헬레니즘 문화의 발생과 분포는 알렉산드리아의 도시망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는 그의 부장 셀레우코스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그리스 이민에 의해 다스려지는 그리스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기원전 280년 셀레우코스에서 안티오쿠스로 정권이 바뀐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기원전 256년 박트리아의 지사 디오도투스가 쿠테타를 일으켜 이른바 그레꼬박트리아 왕국을 세웠지만 마찬가지로 그리스문화를 바탕으로 토착문화를 수용하여 그리스풍을 주체로 한 아름다운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웠다.

기원전 280년 경 박트리아의 서쪽에 이란계의 파르티아 왕국이 독립하여 그리스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순수한 이란문화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박트리아와 그리스 본국과의 연락은 파르티아의 출현으로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그 이후 박트리아는 점차 힌두쿠쉬 산맥의 남쪽으로 진출하여 카불에서 펀잡지방으로 세력을 뻗어나갔다.

데메트리우스의 남방원정으로 헬레니즘이 카불 강변에 영향을 미치고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기원전 174년 테메트리우스가 없는 틈을 타서 반란이 일어나고 박트리아의 왕통은 분열되고 혼란을 겪게 된다.

박트리아의 쇠퇴는 북쪽 스키타이족의 융성과 남하를 가져왔고 기원전 140년 경 박트리아는 멸망의 길은 걷게 된다.

그러나 박트리아의 그리스인은 이미 테메트리우스 시대부터 속속 힌두쿠쉬 산맥 남부의 간다라지방으로 이주하였고 오히려 이 지방에서 새로이 일어난 불교와 만남으로써 아시아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었다.

나가사와 가즈도시는 '실크로드의 문화와 역사'에서 그리스인들은 어느 곳을 가더라도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그런 민족으로 간다라 지방에 와서 불교와 접촉했을 때도 우상과 신전이 없는 이 종교에 대해 한없는 불만을 품었다.

이 새로운 종교를 위해 공예가들은 다투어 불상을 만들고 건축가는 장엄하고 화려한 신전(사원)을 쌓았다. 이렇게 하여 화려한 간다라 불교예술이 탄생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불교가 퍼져나감에 따라 그리스 예술의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는 불교예술은 찬란한 빛을 내면서 전 세계로 전파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쿠차와 투르판, 호탄, 니야, 미란을 비롯하여 중국의 둔황, 운강, 용문, 한국, 일본에서 향기 높은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의 결과이다.

그리스-오리엔트 문명 융합된 헬레니즘

알렉산드로스의 군사적 정복활동은 사상 최초로 동·서양간의 문명교류를 이루어지게 만들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유라시아를 망라한 대제국으로서 그리스 문명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고대 오리엔트 문명, 페르시아 문명, 인도 문명 등 실로 다양한 중요 문명을 갈무리하고 있다.

헬레니즘은 알렉산드로스 동방원정(BC 334)으로부터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할 때(BC 30)까지의 약 300년간 그리스 문명과 오리엔트 문명이 서로 뒤섞이고 융합하여 생긴 하나의 복합문명이다.

마케도니아를 방문할 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적이나 흔적을 찾고 싶었다.

어쩌면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피아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유적이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도시엔 활기가 없고 침체된 은둔의 표정으로 맞이해 주었다.

알렉산드로스의 흔적을 찾으러 갔다가 알렉산드로스를 잃어버리고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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