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채화의 문학칼럼]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한채화의 문학칼럼]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1.04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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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화의 문학칼럼
한 채 화 <문학평론가>

해가 바뀌면서 연하의 덕담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함을 채운다. 예전 같으면 연하장 배달로 바빠야 할 집배원들은 상업성 우편물 배달로 바쁘고, 그 대신에 연말연시 인사는 휴대 전화가 맡아 수고를 한다. 이모티콘까지 곁들였으니 솜씨 또한 일품이다. 소식 한 번 먼저 드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에도 연말연시에 다시 선수를 빼앗겼으니 소식 주신 모든 분들께 고맙고 송구스럽다.

그 덕담들을 살펴보면 참으로 다양하다. 복을 받으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복을 지으라는 사람도 있다. 건강을 먼저 생각하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길 위에서 헤매고 있다며 엄살을 피우는 사람도 있다. 모두들 자신이 진심으로 바라는 바를 적었으니 고맙고도 고마운 노릇이다. 나는 "무자년 백지 위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시기 바랍니다"라고 비교적 짧은 답장을 보냈다. 실로 모두들 믿음과 만족과 기쁨과 사랑으로 채색된 아름다운 시간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포함된 답장이다.

어쨌거나 이렇듯이 한 해 한 해 시간이 쌓여 지금의 나는 미혹(迷惑)하지 않다는 불혹(不惑)을 지나 지명(知命)이라고 불린다. 천명(天命)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건만 지명이라 하니 천명을 좀 알고 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연배의 도종환 시인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창작과비평, 2007년 겨울호, 통권138호)라는 시를 통하여 삶의 좌표를 찾고 있다. 시적 화자는 인생의 시간이 우주의 계절 가을과 같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한다.

조금 여유로운 직장인이라면 무료함으로 시계를 바라보았을 시간인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화자에게는 산골짜기를 흐르는 샘물 같이 맑고 아픔을 모르던 시간도 있었으며, 치열했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의 뒤편에는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치열하게 살았던 만큼이나 아픔도 많았던 시간이다. 주인공은 그로부터 조금은 벗어난 시간인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가을처럼 빨갛게 물들고 있다.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졌음을 인식하는 시적 화자는 초조하다거나 불안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이 고맙다.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 번은 더 허락하실 것을 믿기에 기쁘다. 그러나 구름을 물들이는 노을과 황홀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기쁠 것이다. 그 까닭은 이미 시적 화자가 삶속에 있으면서도 삶을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거리를 가더라도 자동차의 속도를 높여 목적지만 바라보고 달리면 목적지는 멀게 느껴지고, 느린 속도로 가면서 길가에 핀 코스모스와 수해로 쓰러진 가로수를 생각하면 오히려 목적지가 가깝게 느껴진다. 게으름이 아니라 느림의 미학이며, 열기가 사라진 화로가 아니라 열기를 재로 감추고 있는 화로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시적화자에게 머지않아 다가올 겨울은 결빙이 아니라 오히려 해빙의 계절이라고 타자의 목소리로 전한다. 권위적인 목소리 뒤에는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에 대한 소망이 숨어있다. 다만 그러한 변화 속에도 나와 나를 증거해줄 것들에 대한 믿음을 화자는 가지고 있다. 벌써 많은 시간을 살아서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아직도 몇 시간이 남아서 기쁘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낙천적인 관점이 아니라 새해에 진지하게 삶을 대면하는 기쁨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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