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의 문학칼럼]‘신도버린 사람들’에 대하여
[박홍규의 문학칼럼]‘신도버린 사람들’에 대하여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1.16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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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문학 칼럼
박 홍 규 <교사>

인도, 카스트 제도 속 최하층민들의 이야기. 달리트,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태어날 때부터 부정(不淨)한 존재인 사람들, 상층 카스트와는 접촉조차 금지된 사람들의 삶은 전생에서 지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내세의 구원을 위해 그런 삶을 내면화한 채, 나아가 노예로서의 삶에 회의하지 않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현실을 거부하고 주체로 서서 살아가고자 했던 사람들의 삶, 그 삶이 주는 감동을 그린 책이다.

몇 끼를 굶고 있어도,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연락도 못해 가족의 안부가 궁금해도 상층 카스트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하명받은 일을 무엇보다 먼저 해내야 하는 굴종의 삶. 그것을 거부하고 마침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책을 읽으면서, 법으로는 폐지되었어도 현실 속에서는 강하게 인도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그들의 시간을 옭아 쥐고 있는 그 카스트 제도라는 것에 생각이 집중되었다. 상층 카스트인 사제집단 브라만이야 제도의 최대 수혜자로 그것을 향유하며 유지하려 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는 없으되 충분히 그러리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다 할지라도 가장 낮은 바이샤 계급이나, 그들이 섬기는 신을 모신 사원에조차 들어갈 수 없는 불가촉천민조차도 온갖 멸시를 받으며 제도를 당연시하고 있다. 일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거부한 책의 주인공과 같은 사람들은 소수다. 책을 읽는 동안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몇 천년 동안이나 존속해온 질긴 그 제도의 생명력과 함께.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종교이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믿음인데 무슨 의심이 필요할 것인가 의심하는 일 자체가 불경이 될 터, 더구나 전생과 내세를 연관 짓고 있으니 현실의 고통은 오히려 가벼웠을 것이다. 믿음으로 허리 굽힌 달리트 위에 드리워진 지배층의 교묘함, 은밀히 웃음 짓는 그들의 교활함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전쟁이 일상이던 시절에는 사람들의 의식이나 생각, 판단의 초점도 전쟁에 고정된다. 죽음은 더 이상 낯선 모습이 아니고, 죽임도 익숙해진다. 슬픔도 나만의 것이 아닌 이상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대상은 아니게 된다. 고통스럽고 힘에 겹지만 그러면서도 전쟁은 장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로 묘사되고, 마땅히 권장된다.

거기에 사람들은 거부권을 선택하기보다 동의하는 이유와 명분을 자발적으로 찾아내는 경향마저 보인다. 폴포트 치하 캄보디아 사람들은 외부에서 보기에 잔혹한 살육이 진행되는 동안 마찬가지로 잔혹하다는 생각을 얼마나 했을까. 과연 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 전 국민의 3분의1이 죽어가도록 그렇게 놓아두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므로 책을 읽는 '외부인'으로서의 나는 인도의 질곡이며 한계로 카스트제도를 바라보고 있다고 해도, 또 책의 주인공들이야 넘치는 박수를 받고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마땅하다고 해도, 주체로 살아가길 여전히 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도와 인식의 족쇄를 벗어버리는 용기를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제넘은 일이기도 하다.

인도에서 카스트 제도가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그들 스스로 현존 최강대국이라고 자만하는 안하무인이 그러하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에게는 덧씌워진 무의식의 굴레, 오직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위상도 당당하게 버티고 있다.

신도버린 사람들나렌드라 자다브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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