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머 리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0.30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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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구의 동화속 풍경
미희씨는 오늘 오전, 단골 미용실에 들렸습니다.

"저 있잖아요. 암만 봐도 이젠 저에게 긴 생머리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아니에요. 손님한테는 이 긴 생머리가 참 잘 어울려요. 빈말 아니에요."

끝내 미희씨는 머리만 약간 다듬었지요. 지난해 미희씨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머리카락이 조금은 푸석해 보인 모양입니다.

미희씨는 초등학교 시절, 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과 긴 머리를 가진 말없는 아이였었죠. 한번은 아이들이랑 긴 머리를 나풀거리며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반 남자 준석이가 유독 미희를 따라다니며 괴롭혔습니다.

미희의 긴 머리를 잡아당겨 미희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울게 만들었고, 갈래 머리를 하고 왕방울을 달고 오면 "야들아, 저 미희 머리에 붙은 왕방울 꼭 눈깔사탕 같지 않냐." 하면서 미희의 왕방울을 잡아당겨 사탕 먹는 시늉을 하면서 또 울게 만들었고요. 그래서 준석이는 복도에서 여러 차례 의자를 들고 벌을 서기 일쑤였습니다. 미희는 그런 준석이가 정말 싫었죠.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세월이 흘러 어찌된 운명인지 미희와 준석이는 같은 대학교에 들어가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장을 받은 준석씨가 술을 몇 잔 마시고 속에 있던 말을 주섬주섬 꺼내놓기 시작했습니다.

"미희야. 나 니 좋아하는 거 알지. 난 니 그 긴 머리가 좋아서, 너를 좋아하게 된 건 순전히 다 니 그 머리 탓이야. 나 기다려 줄 수 있겠니. 나 술 많이 챘지."

미희씨는 벌건 얼굴로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는 준석이가 그리 밉지만은 않았습니다. 대답 대신 준석의 손을 꼭 잡아 주며 몸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만 말했죠.

세월이 흐른 후 둘은 정말 결혼을 해 아들 한 명을 두었고, 그 아이가 올해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 온 미희씨는 올해는 병원에 장기간 입원중인 남편 준석씨의 건강이 빨리 회복되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긴 머리를 더 정성스레 빗습니다.

베란다를 통해 들어온 가을햇살이 긴 머리를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아마도 첫눈이 내리기 전 준석씨가 머리에 하얀 붕대를 풀고 다가와 미희씨의 마를 대로 마른 어깨를 꼬옥 안아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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