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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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23.12.05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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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달빛이 감나무의 가지 사이사이에 그물처럼 걸렸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아득한 그림자들마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밤의 풍경은 그렇게 애달픈 듯하면서도 끝없이 벅차오르도록 만들어 놓는다. 한낮을 비껴온 밤공기마저 따스함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주홍빛 감이 지금의 내 눈에는 등불로 다가왔다. 아프지 않은 화살 하나를 가슴에 던져주고는 지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형상이다. 그야말로 초롱초롱한 자태이다. 이끌리는 느낌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서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감은 점점 밝기를 더하고 있다. 어찌 보면 나를 호되게 지키는 것 같기도 하며 조용하게 부르는 소리인 것 같다. 그 근원이 어디서부터일까, 또 누구 때문일까, 하며 달빛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면서 묵언의 시간에 이른다.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잔재한 슬픔이 아니라 뜨거운 회한의 솟구침이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내 존재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빚어지고 있다. 원초적 본능의 울림을 따라 부모님이 떠오르는 거였다. 봇물 같은 그리움이라고 해야 하나.

올망졸망 여러 형제들 틈에서 자라났다. 작은 텃밭에는 감나무도 식솔처럼 서 있던 시절이다. 가난이 불편한지도 모르며 살아왔다. 어느 집이건 누구나 할 것 없이 시대적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리라. 추웠던 기억도 쓰렸던 기억도 등불아래 흩어져서 이제는 까만 밤과 함께 사라져 간지 오래이지만.

감을 보자니 부모님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다. 음성조차 귓전에 가깝다. 세상천지 부모님의 은혜만큼 넓고 깊은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문득 입가에서 학창시절에 익혔던 시어 하나가 맴돌기 시작한다. 조선시대의 시인 박인로가 읊은 조홍시가가 지금 이 상황을 너무도 명명하게 설명하고 있기에 그렇다. 부모님께서 살아생전 기다릴 수 없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아무리 후회한들 부질없다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하고야 말았다.

달빛을 입은 감이 부모님의 형상이었다. 가을밤에 등불로 찾아오셨다는 생각에 젖어든다. 지금껏 세상사는 동안 힘든 일을 만나도 쓰러지지 않도록 지켜주신 은혜에 감사를 거듭하면서 그림자를 좆아 존경을 표한다. 앞서 가시며 밝힌 생의 길목이 저 달빛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기에 잔잔한 독백은 그렇게 이어져만 가고 있다.

어느덧 내 인생도 노을빛에 이르렀다. 이제 시간을 아끼며 밝은 길로 걸음을 내딛고자 노력한다. 지난했던 생의 길목이었지만 혼신을 다해 살아내셨던 부모님의 자취가 오늘따라 더욱 또렷하다. 달빛과 어우러진 감이 현실속의 상황처럼 지금의 내 가슴속을 넓히기까지 한다.

감이 더 밝은 등불로 다가오는 가을밤이다. 내가 주관해가는 삶이라지만 부모님은 영혼 깊은 곳에서 언제나 바른 길로 인도하고 계신 분들이었다. 이 모양 저 모양 부족했던 효가 떠올라서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기조차 어렵다. 조롱조롱 주홍감이 그래도 따뜻하게 나를 내려다본다. 한없이 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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