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측이심(如厠二心)
여측이심(如厠二心)
  •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 승인 2023.11.1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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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벽에 걸린 달력을 뜯어내자 겨울을 알리는 두 장 남은 달력엔 찬 공기가 휑하다. 스산한 계절 때문일까 괴팍한 성격 탓일까 철새처럼 둥지가 바뀌는 계절이면 온 집안을 홀랑 뒤집는 나를 두고 사춘기보다 더 무섭다는 갱년기란다. 구석구석 채워진 햇빛이 온 집안을 누리던 날 현관수납장을 정리하다 화들짝 놀랐다. 서랍 속에 파크골프공이 덩그러니 있는 게 아닌가. 몇 해 전, 파크골프 열풍이 일면서 계절 가리지 않고 괴춤이 축축해지도록 열정적으로 다녔다. 파크골프는 Park(공원)와 Golf(골프)의 합성어다. 골프장처럼 잘 가꾸어진 잔디에서 자연을 벗 삼아 테니스공만 한 크기의 공을 골프처럼 경기하는 스포츠다. 주로 장년층과 노년층에서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즐기기 위한 스포츠로 친목도모의 인기종목 중의 하나다.

새벽안개를 걷어내고 햇살이 일렁이기 전 풀잎에 맺힌 이슬을 바지로 닦아가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 커다란 파크골프공을 홀컵을 향해 볼을 치면서 아침을 열었다.

그날도 아름답고 목가적인 너른 파크구장에서 장타를 쳤는데 홀 밖으로 날아간 공을 찾을 수 없어 공을 빌려 게임을 이어나갔다. 그때 지인께 공을 빌렸는데 폭염으로 잠시 쉬는 동안 까맣게 잊은 채 수납장에서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여측이심(如厠二心)이라 했던가. 어찌 뒷간 갈 때와 올 적 마음이 다른지 공을 찾지 못해 안달하고 있을 때 잠시 빌려준 것을 까맣게 잊었다니 이기적인 나의 행동은 구전으로 전해오는 설화의 소경과 무엇이 다를까.

설화의 눈 한번 떠 보는 게 소원인 소경이 있었다. 안타까운 사연은 꼬리를 물고 널리 퍼지면서 부엉이가 알게 되었다. 부엉이는 밤에만 활동하고 있으니 낮에는 눈이 필요하지 않다며 소경을 찾아갔다. 낮에 눈을 빌려 드릴 테니 밤이면 눈을 꼭 돌려줄 것을 다짐을 받고 눈을 빌려 주었다. 다음날 아침, 소경은 너무도 아름답고 눈부신 세상을 보았다. 그날부터 낮에는 소경이 밤엔 부엉이가 교대로 눈을 사용하였다. 어느 날부터 욕심이 생긴 소경은 부엉이 눈을 가지고 멀리 도망가 새로운 세상을 만끽했다. 밤이면 수없이 반짝이는 별을 보고 낮에는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으니 여한이 없었다. 욕심이 과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소경의 눈이 점점 흐려지더니 깜깜한 어둠처럼 소경이 되었다. 다시 부엉이를 찾아갔으나 부엉이는 눈이 없어 먹이를 찾지 못해 굶어 죽었고 소경은 또다시 어둠 속의 갇힌 소경이 되었다.

소경은 부엉이에게 진심으로 약속했고 나 역시 잠시 빌린 공을 꼭 돌려드릴 것을 약속했다. 허나, 여측이심처럼 긴할 때는 앞뒤를 가릴 수 없을 만큼 몹시도 급하게 굴다가 위기가 지나 급했던 마음이 사그라져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낯이 후끈 달아오른다. 내가 꼭 필요하여 도움을 받아 빌렸음에도 다급할 때의 초심은 사라지고 지금껏 잊고 있는 나를 두고 여측이심이라 하지 않겠는가. 늘 내 옆을 있어주는 사람이 귀하고도 귀한 은인인데 말이다. 아둔한 소경 같은 마음이 될까 싶어 만사 제쳐두고 연락을 했다. 이러구러 변명을 하는 내게 한사코 괜찮다며 만류하는 지인께 빌린 공을 돌려드리겠다는 명분으로 겨우겨우 약속을 잡았다. 진땀 흘리며 변명을 한 난 양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긴 한숨을 쉬었다. 인생여정 우둔하게도 남의 신세를 지지 않으며 살아갈 것 같았는데 가슴으로 따뜻하게 다가오는 `괜찮아' 한마디는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하루 햇살이 익어가는 오후 나의 바램을 아는 걸까. 바람도 걷고 싶을 때가 있는 것처럼 더없이 잔잔하다. 부러 약속장소 먼발치에 주차를 하고 솔바람과 함께 자분자분 걸으며 주머니 속 공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과 우정을 한 조각 건네어 줄 마음이 동하길 바라며 커피숍 문을 밀고 들어선다. 온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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