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여사의 거짓말
김 여사의 거짓말
  •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수필가
  • 승인 2023.10.1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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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즐거운 말소리에 헛웃음이 나온다. 반어법적 수사지만 속을 다 보이니 새겨들을 필요가 없다. 오래 사는 일은 오래 고생하는 일임에도 당신은 오래 살고 싶은 것이다.

추석 명절이 한참 지나서야 혼자 사시는 구순의 친정엄마께 선물을 보냈다. 가까이 사는 올케에게 우족과 소고기를 보내면서 푹 고아서 엄마께 한 그릇 가져다 드리라 부탁했다. 그리고 올케에게는 따로 홍삼 즙을 선물했더니 반을 덜어 곰국과 함께 엄마께 드린 모양이다. 보양식을 받자 바로 전화를 하신다.

“나, 얼른 죽어야 하는데 언제 죽으라고 이런 걸 자꾸 갖다주니” 원망의 말이 아니다. 몹시 반갑고 들뜬 목소리다.

늙음은 쉬지 않고 온다. 게으름도 피우지 않는다. 노화의 성실함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인정하고 마주하기가 쉽지는 않을 터지만, 대부분 노인이 되면 즐거울 때도 괴로울 때도 습관처럼 죽음이란 단어를 무기처럼 앞세운다. 죽어야 하는데 왜 안 죽는지 모른다며 뻔한 거짓말을 한다. 나의 김 여사도 예외는 아니다. 외식하는 날, 무얼 드시고 싶으냐고 물으면 오리고기를 먹으면 풍에 걸리지 않는다고 꼭 오리백숙을 사달라고 한다. 어지러울 때는 소고기 육회가 좋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러면 다음에는 육회를 사드려야 한다. 얼른 네 아버지한테 가야 한다고 노래하면서도 당신은 이 세상에 오래 머물고 싶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떠나시기 전, 병약한 엄마에게 유언처럼 하신 말씀이 있다. 꼭 삼 년만 팔팔하게 살다가 오라고 했었다. 며칠 있으면 아홉 번째 맞는 아버지 기일이다. 가끔 나와 동생들은 실실거리며 김 여사에게 농을 건다. 삼 년이 지난 지가 언젠데 간다, 간다고 하면서 아직도 이러고 있느냐고 하면 못 들을 척 딴청을 피운다. 짓궂게 재차 큰소리로 물으면 마지못해 왜 안 죽는지 모른다고 대답하신다. 듣기 싫은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도 거짓말을 잘하셨다. 살아생전 맛난 음식을 사드린다거나 별일 없으신가 안부 전화를 하면 몸이 아파 병원에 다니면서도 잘 먹고 건강하다며 내 걱정하지 말고 너희나 잘 지내라고 하셨다. 전혀 괜찮지 않은 상황이면서도 늘 괜찮다, 괜찮다 하는 거짓말은 자식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깊은 사랑이었으리라.

김 여사는 바쁘다. 오전 7시쯤이면 혼자 아침 식사를 챙겨드시고 8시에 주간 보호소로 가신다. 재미있는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다. 저녁 5시에 집에 오면 제철 과일을 빠짐없이 드시며 드라마를 시청하고 잠자리에 든다. 휴일인 일요일 한나절은 교회에서 보낸다. 저녁은 곁에서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챙겨주는 큰며느리하고 단둘이 외식하거나 가끔은 다른 자식하고 외식한다. 며느리하고의 외식비는 대부분 김 여사가 내지만, 다른 자식하고의 외식비는 절대 내지 않는다. 빨래나 청소는 도우미가 해 주고 있으니 지금 김 여사는 바람이 잘 날 없던 자식 일도, 부족해서 불편했던 경제적인 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생애에서 가장 편안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종종 죽지 않고 너무 오래 산다고 거짓말을 하신다. 노인에겐 일상생활을 스스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한다. 가족구성원이 달라지고 노인의 생각도 달라졌다. 간섭받는 걸 싫어하니 효도하는 방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음이다.

내 모습도 엄마를 닮아가고 있다. 노후의 삶도 닮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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