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과 전우원
`가디언'과 전우원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3.04.0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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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런던에서 발행되는 `가디언'은 `타임스, `데일리 텔레그래프'와 함께 영국의 3대 일간지로 꼽힌다.

공영방송 BBC를 빼면 영국에서 가장 많은 온라인 구독자를 보유한 매체이기도 하다.

얼마 전 이 신문이 한 보고서와 사과문을 발표해 국제적인 화제가 됐다. 200여년전인 1821년 맨체스터에서 가디언을 창간한 존 에드워드 테일러와 주주들의 전력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보고서는 면화 거래상인 테일러와 창간에 참여한 맨체스터 지역 상인 11명 중 9명이 노예제에 가담했다고 지적했다.

가디언은 “테일러는 당시 미국의 흑인 노예 농장에서 면화를 사들였고, 면직업체를 경영한 투자자들 역시 노예제 발흥에 동조한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피해자들이 사과를 요구한 것도 아니고 당시 설립자가 노예를 거래·보유하거나 노예농장을 직접 운영한 것도 이니었다. 하지만 가디언은 노예 착취를 통해 생산된 면화를 수입해 돈을 벌었으니 반인륜적 범죄에 가세한 셈이라며 “인종차별·불공정·불평등에 대항한다는 신문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결론 지었다.

세간의 관심끌기용 이벤트가 아닌지 실짝 의심도 들었지만 10년간 1000만달러를 들여 피해 배상 차원의 정의 복원 프로그램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한 대목에서는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피해자 등 누군가가 추궁해서가 아니라 100% 자발적 사과였다는 점에서 사과의 요건을 갖춘 사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가디언은 2년 전 한 대학에 조사까지 의뢰하며 설립자의 200년 전 전력을 들춰내 공론의 도마에 올렸다.

사과에 일체의 사족이 달리지 않았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사실 테일러가 수입한 면화를 당시 대서양 건너 미국 남부의 농장에서 수확한 흑인 노예와 그 후손이 누구인지 특정하기도 어렵다.

정상 참작이나 변명의 여지가 있음에도 주저없이 신문 설립자들을 반인륜 범죄의 공범으로 지목했다. 가디언은 당시 농장이 있던 지역의 공동체사업을 지원하고 흑인 공동체에 관한 보도를 확대하겠다는 구체적인 배상 약속으로 사과를 완성했다.

가디언의 사과를 장황하게 언급한 이유는 공인이나 공조직의 사과다운 사과를 접하기 어려운 우리에겐 낯설고 부럽기까지 한 소식이기 때문이다. 관내에 산불이 난 날 각각 술자리와 골프연습장에서 시간을 보낸 두 도지사의 궁색하다 못해 구질구질한 대응이 오버랩 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관계도 모호한 구차한 변명들로 얼룩진 두 도백의 누더기 사과는 공감은커녕 욕만 키웠다. 한 분은 “술을 마시진 않았다”고 했다가 술잔을 든 사진이 공개되자 “건배만 했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산불이 난 날 근무시간에 골프연습장을 찾은 다른 분은 “1시간 조퇴를 했다”고 했으나 조퇴 처리는 3일 후에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로 돌변해 허위보도를 한 언론에 책임을 묻겠다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문제의 본질을 벗어난 변명이고 권력은 책임을 수반한다는 상식을 망각한 행동이다.

두 사람에 비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 전우원씨의 사과는 격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할아버지를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의 생명을 앗은 학살자'라고 단정하면서 일체의 토를 달지 않았고 할아버지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우울증 전력과 영상을 통해 마약 투약 장면을 시연한 돌출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던 사람들도 그가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코트를 벗어 비석을 닦는 장면에서 의심을 거두기 시작했다. 자신을 죄인으로 낮춘 일관되고 진중한 언행은 5·18 피해자와 유족의 공감을 얻고 박수까지 받았다.

전두환의 후손이라고 누군가의 본보기가 되지말라는 법은 없다. 사과의 기본도 모르면서 연일 사과할 일을 만들어내는 낯두꺼운 위정자들이 전우원씨의 행보를 돌아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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