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삼충로
15. 삼충로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8.08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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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성 지키다 스러져간 충청병영 충절 기리며…

신제인 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성안길 입구 맞은편 버스정류장 위쪽에 있는 길 이름이 '삼충로'인데 어떤 이유에서 붙여진 것일까 청주시의 도로명 부여사유에 의하면 '삼충로'는 "조선 이인좌의 난 때 병사 이병상,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의 충절을 기린 사당인 '삼충사'가 위치한 장소를 기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인좌의 난'은 어떤 사건이며, '삼충사'는 어디에 있었고 현재는 어떤 모습일까

일반적으로 '이인좌의 난'은 "조선 후기 이인좌 등의 소론(少論)이 주도한 반란으로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서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소론은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박필현(朴弼顯) 등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密豊君坦)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으며, 여기에는 남인들도 일부 가담하였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때 청주는 이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일까 1728년(영조4)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했던 이 사건은 그해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당시 충청도의 군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충청병영이 바로 청주에 있었기에 이곳을 먼저 점령하고 청주를 거점으로 한양을 향해 진격하려했다. 그러나 북상하던 반군은 오명항과 박문수 등이 이끄는 관군에게 안성과 죽산에서 격파되었고, 청주성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웅 등에 의해 상당성에서 궤멸되었다.

이봉상 등 3인의 충신 모신 사당

이 과정에서 청주성을 지키다 순절한 충청병영의 이봉상·남연년·홍림을 기리기 위하여 1731년(영조7)에 청주읍성 북문 안에 세 분의 충신을 모셨다는 의미의 사당인 삼충사(三忠祠)가 세워지게 된다. 그래서 현재 '삼충로'라는 길 이름도 지어진 것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위치상으로 맞은편 '중앙공원길'을 '삼충로'라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현재 삼충사는 표충사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데 여지도서 등의 지리지에도 위 세분을 모신 사당이 북문 안에 있으며, 사당의 이름이 삼충사가 아닌 표충사라고 나온다. 그것은 1736년에 삼충사가 표충사로 사액(賜額)되었기 때문이다. 서원이나 사당에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는 것을 사액이라고 하는데 소수서원이 백운동서원에서, 그리고 청주 용정동에 있는 신항서원이 유정서원에서 각각 사액된 것이다. 이처럼 사액이 되면 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는 것은 물론 면세·면역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이후 사회적으로 큰 폐단이 되어 대원군때 600여 개에 달하는 서원을 47개소만 남기는 서원철폐를 단행하게 된다. 이때 표충사는 철폐되지 않은 사당으로 그 명맥을 지속하고 있는 곳이다. 현재 표충사는 삼충사로 처음 세워졌던 그 자리에 있지는 않다.

1939년 도시계획에 밀려 수동으로 이전

1939년 도시계획에 밀려 지금의 자리인 수동으로 옮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표충사의 위치는 대성여상을 지나 우암초등학교와 만나는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난 골목길 끝에 있다. 그래서 이 일대의 길 이름도 '표충로'와 '표충골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표충사의 대문을 들어서면 표충사묘정비와 삼충사문이 보인다. 그 문을 지나면 외삼문이 있고, 오른쪽에 표충사가 어떻게 옮겨지게 되었는지를 기록한 '표충사이건사실비'가 있다. 외삼문을 지나 내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세 분의 위패를 모신 표충사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고, 그 옆에 '삼충사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 '삼충사 사적비'는 사당이 세워진 1731년에 이덕수가 짓고 조문명이 쓴 것인데 현재 표충사 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사당의 이름이 삼충사에서 표충사로, 사당의 위치가 읍성 안에서 수동으로 바뀌었지만 이 비석은 위치만 바뀌었을 뿐이다. 특히 비문에는 "상여 행렬로 가장한 반란군이 수레에 무기를 싣고 청주성 안으로 들어와서 비바람 치는 캄캄한 밤을 틈타 병영의 군사를 공격하니 병영의 패장인 양덕부가 문을 열어주었고." 등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실감나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오랜만에 찾은 표충사에서 또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안내판의 문구였다. '청주성 북문 밖에 사당과 함께 사적비를 세우고 삼충사라고 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청주읍성도와 여지도서 등에 분명히 읍성 북문 안에 세웠다는 표시와 기록이 있으니 바로잡았으면 한다. 그리고 '삼충로' 입구에 길 이름을 정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하는 안내판이라도 있다면 이곳을 지나다니는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길 이름 하나에도 의미가 있음을 느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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