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인의 보금자리, 청주 영하리유적
신석기인의 보금자리, 청주 영하리유적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20.05.3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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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신석기시대 문화의 성립은 빙하기에서 후빙기로 전환되는 기후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빙하기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은 빙하의 영향으로 삶의 지역에 많은 제약을 받았으며, 지속적으로 먹거리를 찾아 이동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구석기시대의 마지막 빙기인 뷔름(wur m)빙기는 약 1만년 전쯤에 끝나고, 그 후 기후는 오늘날과 같은 자연환경으로 변하게 된다. 날씨가 따뜻해짐에 따라 얼음이 녹아 바닷물의 높이가 100m 이상 급격하게 상승하며 빙하기에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낮은 지역은 물에 잠기어 오늘날과 같은 지형을 갖추게 된다. 산맥과 강으로 나누어지는 각 지역은 지형과 환경적 특징으로 인해 각각 독특한 자연환경을 만들었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우리나라의 신석기문화가 지역적으로 서로 다른 특징을 갖고 형성되어 여러 개의 문화권역으로 구분되는 배경이 되었다.

신석기시대 중기에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충청내륙지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집자리가 대천리식 집자리이다. 이 집자리는 독특한 형태를 갖춘 집자리로 옥천읍 대천리에서 처음 찾아져 유적이 위치한 지명을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집자리의 평면형태는 장병형이고 돌출된 출입구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내부에는 불땐 자리, 기둥구멍, 저장구덩 등이 시설되어 있다. 구조적으로는 내부공간을 분할할 수 있고, 구릉 정상부에 단독가옥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 사람들은 강을 낀 낮은 구릉지형을 생활터전으로 선호하여 독립적인 보금자리를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집자리가 청주 세교-초정간 도로확포장공사 구간의 매장문화재 조사과정에서 찾아졌다. 청주 영하리유적이다. 해발 80m의 독립능선 정상부에 신석기인의 보금자리인 대천리식 집자리 1기가 확인되었다. 집자리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규모는 길이 8.5m, 너비 4.6m, 깊이 0.5m이다. 집자리 남동쪽은 한국전쟁 때에 판 참호로 일부 훼손되었다. 집자리 내부시설은 불땐 자리, 저장구덩, 출입시설 등이 있다. 불땐 자리는 특별한 시설 없이 바닥면을 우묵하게 파서 만들었으며 중앙에서 북쪽으로 약간 치우쳐 설치하였다. 유물은 빗살무늬토기, 화살촉, 숫돌, 미완성 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집자리 내부에는 숯이 전면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화재에 의해 폐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집자리에서 나온 숯을 절대연대측정한 결과 기원전 3,000년 경의 연대값을 얻었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집자리이다.

이 시기(기원전 3,500~3,000년 무렵)는 지역별로 토기양식과 석기 구성에 변화가 일어나고 문화의 지역성이 두드러지며, 바다자원의 활용을 통한 유적의 확산 등이 이루어진다. 신석기시대에 기술적, 문화적, 경제적인 변화가 일어난 때이다. 이러한 변화의 원동력은 본격적인 농경의 확산에 따라 전개된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밀접한 계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옥천 대천리 집자리에서 쌀, 보리, 밀, 조, 기장 등 오곡(五穀)이 출토된 것은 이를 잘 뒷받침한다.

이러한 유형의 집자리에서 출토된 유물로 볼 때 대천리식의 집을 짓고 살았던 신석기인들은 그물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았고, 활을 이용한 사냥을 하고, 채집생활을 하며 농사짓기도 하여 풍부한 먹거리를 확보하였던 듯하다. 채집한 도토리는 갈돌과 갈판에 갈아 불에 조리해서 떫은맛을 없애고 먹었을 것이다.

청주 영하리 신석기인들은 미호천 지류인 내수천을 배경으로 독립능선에 단독으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현재는 현대인의 생활편의를 위한 도로가 개설되어 있지만, 이전에는 신석기인의 생활터로서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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