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신녀
돌신녀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20.05.2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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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나는 돌신녀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얼굴을 내미는 이 봄. 이 봄을 나는 온몸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 힘으로 하기엔 벅찬 공사를 시작했다. 뒤꼍이다. 산을 깎아 터를 잡은 곳이라 언덕이 있다. 깎인 자리를 그냥 두려니 풀만 무성하여 거칠어 보인다. 주변에 꽃을 심고 다독거려도 때깔이 나지 않아 늘 불만스러웠다. 포크레인을 불러서 해야 할 큰 공사는 아니고 고민만 키워 왔다.

높이 1미터 길이 6미터쯤 되는 면적에 석축을 쌓겠다는 것이다. 남편은 손으로 석축을 쌓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두 번 다시 말도 못 꺼내게 한다. 집을 짓고 마당을 고를 때 모아놓았던 돌도 처리할 겸 내 손으로 석축을 쌓을 생각을 했다. `그래 당신이 안 하면 나 혼자라도 합니다.' 생각만 하고 있으면 생각으로 끝나는 거다. 일단 저질러보자 마음먹고 팔을 걷어붙였다.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시작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바위만 한 돌을 살살 달래고, 굴려서 기초를 잡아갔다. 작은 돌은 번쩍 들어 올려 쌓기 시작했다. 평소 내가 쓰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디서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지 나 자신도 놀라웠다. 돌에도 암수가 있다. 자연석은 암수만 잘 맞추면 쌓기가 수월한데 파석은 암수가 없어 쌓기가 까다롭다. 자연석만으로는 돌이 모자라서 파석을 함께 썼다. 돌을 들었다 내렸다 수없이 반복하다 보니 장갑도 구멍이 나고 손목은 시큰거려 아팠다. 처음엔 쓸데없는 일 한다고 핀잔만 하더니 며칠이 지나도 포기하지 않으니 안쓰러웠던지 남편도 거들기 시작했다. 한 칸 한 칸 올라가는 재미에 아픈 것도 참을 만했다. 혹여 허물어질까 봐 긴 돌로 중간 중간에 쐐기돌까지 박았다. 우리 힘으로 들어 올릴 수 없는 돌은 굴리고 밀고 살살 달래면 돌도 움직여준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돌을 만지는 이치와 많이 다르지 않다. 힘에 벅찬 돌을 쌓을 때마다 그렇지 큰 것을 이루려면 그만큼의 노력과 더 큰 고통을 인내해야 한다는 것. 돌의 무게를 느끼며 내 몫의 무게를 감당하는 일, 고통을 견디고 살다 보면 구원처럼 희망이 보이는 것이다.

토지작가 박경리 선생님께서도 생전에 가꾸시던 텃밭을 주변에서 나온 돌로 담을 쌓으셨다. 예사 솜씨가 아니었다.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건축을 했을 거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나도 집을 가꾸며 흙과 돌을 만지는 일을 이렇게 좋아하고 잘할 수 있었는지 놀라웠다. 요즈음 정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가장 더운 심장으로 그리고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기와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석축은 보름여의 시간이 걸려 완성했다. 해놓고 보니 우리가 했다고 믿기지 않았다. 좀 어설퍼 보이지만 해냈다는 자부심과 기쁨이 크다. 기성품의 블록이나 전문가가 쌓았다면 완벽하게 멋졌을 것이다. 그러나 엉성하지만 지금 우리가 느끼는 이 뿌듯함은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 능력 밖이라고 생각했던 그 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 기쁨을 어디에 비하랴.

완성된 석축에 물을 뿌려 흙을 닦아냈다. 뽀얗게 세수한 돌 하나, 하나가 예쁘다. 커피를 마시며 우리가 쌓은 석축을 바라보았다. 남편이 나에게 “돌신녀” 라고 부른다.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당신은 돌을 만지고 있을 때 보면 신들린 여자 같어.” 한다. “그래? 내가 돌을 만지고 있으면 그분이 내 몸속으로 들어오시나 봐. 나 전생에 석공이었나.” 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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