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의 꽃
오랜 시간의 꽃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19.08.20 20: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감나무 밑 상사화가 누가 먼저랄까 앞다퉈 촉을 올리더니, 연분홍 층구름이 군데군데 피어올랐다. 만개한 연분홍은 여태 보지 못한 노을인 듯, 솜사탕을 꽂아 놓은 듯 무리를 지었다. 매년 자구를 늘려 분홍색 꽃무리의 향연은 버려진 한 촉의 알뿌리였다. 지금은 100여 개가 넘게 번식이 되었는데, 고양이가 배설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고양이 녀석들이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터에 몇 개는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부러지는 등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발만 흰색인 흰양말이, 까망이, 노랭이, 먹이 서열 맨 마지막 얼룩이가 일을 내 놓고 미안한 듯 상사화 사이에 웅크린 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화사하게 피워낸들 얼마 못 가 떨구어낼 꽃들인데 미운 녀석들.

이 맘 때면 선선해진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의 잎 내음을 실어 집안으로 들인다. 덤으로 낮에는 오렌지 자스민, 브룬펠지어, 치자향을 함께 들이고, 밤에는 야래향이 뜰을 채운다. 달짝지근한 향과 진한 꿀을 머금은 색은 작지만, 가히 놀라운 매력을 지녔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피어서 열흘을 아름다운 꽃이 없다고 하지만 무리지어 피고 지고를 반복하다 보니 연일 잔치다. 척박한 모래 속에 뿌리를 내린 선인장의 꽃은 그 자체로 화사한데 뜨거운 햇살을 등지며 눈이 부신 화사한 꽃을 지우고도 또 틔운다. 과육 속에 긴긴날 모아둔 저장에너지가 발산되는 나날이다.

매년 피워낼 시기를 서로 조정협의라도 한 듯 시기를 달리하고 시간을 달리한다. 늦은 아침에 피어 저녁나절이면 잠을 자는 수련의 향도 코를 들이댈 만하다.

하얀 눈을 비집은 노란 복수초, 동강할미꽃으로 시작, 서향, 수선화, 튤립, 아이리스, 목단, 작약 등등 순서를 정해 끊임없이 피워내는 꽃들은 연일 손님을 초대한다.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사이 피워낸 시간은 화려했던 과거가 되어 다시 피워낼 날만을 기다리며 씨앗을 만들고 양분을 축적한다.

피었던 시간은 며칠 남짓, 꽃을 틔울 준비의 시간은 오랜 인내의 과정이다. 구근류는 꽃을 피우기보단 알뿌리를 비대하게 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인다. 이때 충분히 양분을 축적해야 한다. 장마가 길거나 물 빠짐이 좋지 않으면 썩어버리기 때문에 장마 전에 캐내어 건냉한 곳에서 보관했다가 가을에 다시 심어야 한다. 꽃을 피워 씨앗으로 번식하는 것이 아니라 땅속에서 알뿌리로 번식하는 녀석들이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꽃은 화관이 크면서도 색이 화려하다. 꽃이 진 후에는 바로 꽃대를 잘라주는 것이 알뿌리를 튼실하게 하는데 좋다. 저장양분을 충분히 축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겨울을 나는 대부분의 식물은 한파가 심하거나 외부환경이 안 좋을 때 땅 위의 부분을 키우고 피우기보다는 땅속의 것에 비중을 둔다. 뿌리는 가능한 한 더 촘촘하고도 깊고 넓게, 살지게 한다. 그러면서도 지상부의 것들은 덜어내는 것이다. 가느다란 가지, 덩굴이지만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는 방법이다. 그래서 겨울을 이겨낸 덩굴에서 피워낸 꽃의 향이 지나가는 사람의 가슴에까지 향을 전할 수 있는 까닭이요, 밖으로 나온 비늘에서 피워낸 꽃의 향이 가장 고귀하게 여겨지는 이유이다.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평화와 인권의 꽃을 피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심었다는 청남대의 인동초가 개화시기가 아닌데 꽃을 피웠다. 그 인동초가 집안에도 시기를 같이해 피었다. 오랜 겨울을 이겨낸 시간이 아까워서였을까? 때를 같이해 긴긴 시간 꽃이 필 자리가 아닌 오래된 바위와 기와에 한 포기의 녹회색 꽃이 피었다. 수술과 꽃대도 없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