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 입은 선비
양복 입은 선비
  • 강민식 백제유물전시관학예실장
  • 승인 2018.11.18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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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강민식 백제유물전시관학예실장
강민식 백제유물전시관학예실장

 

만동묘는 다른 나라의 황제를 모신 세상에 하나뿐인 곳이다. 달리 말할 필요없이 임진왜란 때 천군(天軍)을 보내준 은혜와 마지막 황제에 대한 의리로 만들어졌다. 창덕궁의 대보단과 함께 명나라에 대한 의리 자체였다.
  명 만력제 신종(1572~1620)은 참 대단한 황제였다. 48년간 재위하며 무능한 부패의 극치를 보여줬다. 중국 왕조의 멸망은 환관과 외척 때문이라는 공식을 그대로 따랐다. 오죽하면 명나라 멸망은 그로부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거의 정사를 돌보지 않던 신종이 원군 파견만큼은 적극적이었던 사실이 의외였다. 나름 전선이 명나라 땅으로 확전되는 것을 막으려는 조처였다.
  숭정제 의종(1628~1644)은 어떤가. 한때 환관의 전횡을 누르고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후금의 압박과 농민의 반란으로 결국 목을 매 자살하면서 명나라와 운명을 같이했다.
  만동묘에 대한 인식이 옛과 같지 않지만 번듯하게 복원할 때 반대는 없었는가. 과거 만동묘가 훼철된 이유는 당시 집권층이 친청(親淸)정책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대외정책의 변화에 따라 만동묘는 과거의 유산이 되고 말았다. 대보단에서 모신다는 명분을 내세워 기어이 없애고 말았다. 그런 역사성을 후손들이 과감히 그 이전으로 되돌려놓은 것도 가상하다. 아니면 우리 기저에 흐르는 사대주의를 감출 수 없었던 것인가.
  그런데 고을마다 중국 선현을 제사지내는 곳이 반드시 한 곳씩 있다. 바로 서울의 성균관과 향교이다. 향교는 시골 학교란 뜻이며, 또 유학자를 제사지내는 공간이다. 향교의 높은 공간을 문묘라고도 하는데 문성왕 공자를 모신다는 뜻이다. 이곳에 우리나라 학자 18분을 포함하여 중국의 유학자 11~21위를 모신다. 얼마 전까지 대성전 아래 동무와 서재에 모시던 우리나라 학자의 위패를 대성전에 올려 제사지내는 것만 해도 그나마 위안이라 할 수 있을까.
  고려 때부터 국학과 향교에 중국 성현을 모시기 시작한 이래 유교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한 조선에 이르러 제사에 모시는 중국 성현의 수는 급격히 늘었다. 가히 중화의 번방(藩邦)으로 손색이 없었다. 우리 지역 충북에도 모두 18개소의 향교가 있다. 향교는 옛 독립 군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데, 1914년 인근 고을에 통폐합된 영춘, 청풍, 연풍, 청안, 문의, 회인, 청산, 황간에도 향교가 있다. 조선총독부가 효율성을 명분으로 통폐합을 이뤘으되 그나마 옛 고을의 자취를 찾아볼 유일한 곳이다.
  청주향교는 삼남 제일의 향교라 하지만, 사실 우암이 청주를 일컬어 삼남 제일의 고을이라 한 데서 비롯한다. 나주나 전주, 아니면 경상도 각처의 향교를 돌아본다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텐데 우리끼리의 속삭임이다. 아무튼, 향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곡절이 적지 않다. 조선을 세운 이들이 강제하여 전국 모든 고을에 만들었지만, 중기 이후 서원이 그 역할을 차지하며 유명무실화한다. 특목고와 자사고 등이 공립학교를 앞지르는 오늘날과 다르지 않았다.
  사립학교인 서원이 정치 공론의 장으로 성장하였고, 더욱이 향교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퇴락하였다. 그런 청주향교의 중건에 우암과 그의 문인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실제 오늘날 남아있는 중건기 등 기문을 통해 향교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유명무실하다고 치더라도 그 상징성만큼은 살아있던 향교의 중건을 주도하면서 서원과 함께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오늘날도 봄, 가을 두 차례 큰 제사를 올리며, 지역의 유풍을 지키고 있다. 석전제엔 흰 두루마기나 양복을 갖춰 입은 유림이 단체장을 제사장으로 모셔 제향을 올린다. 사드니 경제보복이니 한창 시끄러운 바깥소리에도 경건함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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