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DMZ 안에 있는 궁예성과 청주의 호족
철원 DMZ 안에 있는 궁예성과 청주의 호족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8.10.1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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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한반도에 분단 70년의 아픔을 극복하고 화해와 치유, 평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남북한은 지난 4월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중단됐던 개성의 만월대 공동발굴 사업 재개와 철원 일대 DMZ 내 화살머리 고지의 유해 발굴과 지뢰제거 등에 합의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한국전쟁 때 철의 삼각지로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 중의 하나였던 이곳이 바로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며 건국한 후삼국 시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철원도성이 있는 곳이다.

철원도성은 궁예가 마진(태봉)을 건국하면서 905년부터 918년 왕건의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도읍으로 삼았던 성이다. 철원도성에 관한 가장 최신의 정보는 1942년 일제가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지도'다. 필자가 통일 교육을 위해 이곳을 답사했을 때 놀랍게도 궁예성이 DMZ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놀랐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파괴될 뻔한 귀중한 역사가 분단의 가장 첨예한 장소에 잘 보호되고 있었던 것이다. 방어를 위해 험준한 산지를 끼고 언덕 정상 부분에 제2의 고구려 제국을 꿈꾸며 정사각형의 계획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특히 이러한 궁예의 야심 찬 비전에 함께 협력하고, 동조한 세력이 있었는데, 바로 청주지역의 호족들이었다. 고려사 열전에 보면 청주지역의 주민 1,000호가 철원으로 이주하는 기록이 나온다. 1,000호라면 어림잡아 1만 명 이상의 청주 지역의 주민들이 궁예의 혁신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온 가족과 함께 이주한 것이다. 그만큼 청주지역의 호족들과 지역민들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치를 희망하고, 그 꿈을 함께 꾸고 함께 가꾸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신라말 고려초 청주 호족들은 스스로 관부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962년에 세운 용두사지 철당간의 명문에 보면 청주에 지방학교인 학원까지 운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예종이 발원하여 김희일이 완성한 이 철당간의 명문에 향직자로 김씨, 손씨, 경씨, 한씨 등 4개 성씨가 보인다. 특히 고려 초에는 청주김씨가 청주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김긍율은 2대 혜종과 3대 정종 2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했다.

태조 왕건이 918년 집권한 직후에 청주에 직접 행차해 지역의 호족들을 위무하였으며 축성하기도 하였다는 기록도 나온다. 그만큼 청주의 친궁예 세력들에 대한 부담이 컸던 것이다. 실제로 순군리 임춘길의 모반과 청주수 진선, 선장 형제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때문에 왕건의 청주에 대한 회유와 견제는 지속되었다.

철원도성의 궁예성에서 쏟아져 나올 유물과 유적들이 기대된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서 3미터가 넘는 석등이 나왔고, 광복 후에는 이 석등이 국보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이 석등의 존재부터 확인하고 싶다. 궁예가 죽은 후 1100년 만에 이루어지는 조사와 발굴은 민족사의 끊어진 역사를 복원하는 의미가 있다. 남북공동발굴조사가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더라도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서 추진하면 좋겠다.

비무장지대 안에 잠들어 있는 철원도성의 발굴로 분열과 갈등의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했던 궁예의 비전이 부활하길 소망한다. 새로운 역사를 펼쳐갈 통일 한국의 미래를 꿈꾸는 우리 모두의 소망이 궁예의 염원과 함께 현실로 나타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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