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치골 성지
성모 신심 발상지 김대건 신부 순교로 지켜…성지에 도착해 피정집에 들린 후 기도장소로 올라가다 보면 수녀원 입구 좌측으로 탁 트인, 마치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이 광장에 천주성삼상과 승리의 성모상이 있다. 광장에서는 야외미사를 볼 수 있으며, 광장에 놓인 제대는 고 페레올 주교님의 관 두껑으로 제작된 것으로 수리치골과 우리 교회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광장 우측에는 성모성심을 주보로 창립된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가 '성모성심을 통하여 천주성삼께 영광을!'이라는 모토 아래 성지를 가꾸고 있다.
감추어진 공소·본당의 중심지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성모 신심이 유달리 강했다. 이러한 신심은 1835년 말 이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특히 제2대 조선교구장 성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1838년 12월 1일에 조선교구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모시게 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를 허락하여 1841년 8월 22일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聖母無染始孕母胎)를 주보로 정해 주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박해를 받는 가운데서도 조선 교회가 유지되어 나가고 자신들이 계속 이땅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을 성모님의 은덕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에 감사하기 위하여 성 다블뤼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은 1846년 11월 2일 공주 수리치골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립하고,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보호해 달라고 전구하게 되었다.
수리치골은 당시 교우촌이 아니라 단지 한 신입교우 가족만이 사는 외딴 곳이었다. 그런데 다블뤼 신부와 선교사들이 이 곳을 방문하여 성모 성심회를 설립함으로써 자연 인근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선교사들은 "주일마다 신자 몇 명이 이 곳에 와서 하느님의 어머니 성화 앞에서 몇 가지 기도문을 외우기로 결정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이후 신자들은 이곳에 모여 조선말로 기도문을 외우면서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고 죄인들의 회개를 빌었다고 전해전다.
▲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로 오르던 길을 묵상할 수 있는 14기도처. | ||
수리치골은 공주~유구 간 국도의 중간지점에서 서쪽으로 한참을 들어가야만 하며, 국사봉을 뒤로하고 있는 막다른 골짜기의 궁벽한 곳이다. 옛 수리치골 교우촌은 미리내 '성모 성심 수도회'가 1984년에 정식 인가를 받은 뒤 오랜 답사 끝에 찾아내게 되었다. 그런 다음 수도회에서는 이 곳에 '성모 성심 수도회 분원'을 건립하였다.
국사봉 너머 둠벙이 교우촌 자리
한편, 국사봉 너머 북쪽으로는 또 하나의 유서 깊은 교우촌 '둠벙이'(공주시 신하면 조평리)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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