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찬바람과 수만겹 세월이 빚은 풍광
피로를 풀고 28인의 전사가 묻혀있는 판필라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숲 속을 걸으면 웅장하고 아름다운 러시아 정교회 교회가 나타난다. 알마티 산사태 때 이곳만은 바위에 눌리지 않고 훼손되지 않았다 해서 화제가 되기도 한 교회건물이다. 러시아 혁명 전 짜르 대제 때 지어진 건물로 돔형식의 둥근 첨탑위에 십자가의 화려한 장식이 저녁노을에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건물 주변엔 화려한 자태로 장미꽃들이 피어 있다.
교회 뒤로 걸어가면 28인 전사의 기념조각이 있고 그 앞에는 땅에서 솟아나는 가스로 푸른 불꽃을 태우고 있다. 5월 9일 전승기념일에는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단 노인들이 참여한다고 한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과 젊은 용사들의 조각이 어울려 광장은 신성한 성역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결혼을 하면 신랑신부가 28인의 용사 앞에 와서 참배를 하! 고 꽃다발을 헌화한 후 시내를 돌아다닌다고 한다. 러시아 연방의 붕괴 전에는 소년 단원이 경비를 섰을 정도로 중요한 장소로 인식되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공원에는 러시아 여인들이 많이 보인다. 중앙아시아는 인종이 서로 섞이는 용광로 같은 곳이라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젊은 여인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노인들의 쉼터인 공원엔 수로를 따라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수십 미터 높이의 아름드리 도토리나무와 소나무 등 다양한 수목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어제밤 김 선생 집에서 한국음식을 대접받았다. 오랜만에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난밤은 꼬박 비자문제로 고민하였다. 투르크메니스탄이나 키르키스탄을 경유하여 카스피해와 흑해를 건너 러시아를 돌아서 이스탄불로 갈 여정을 짜 보았지만 이곳의 사정으로는 매우 힘들었다. 같은 러시아 연방지역은 현지에 와서 비자를 신청하면 어렵지 않으리라 여겨졌지만 생각과는 딴판이다. 카스피해를 건너 이스탄불로 향하려던 계획은 난관에 부딪치고 일단 우즈벡 공화국에 가서 다시 결정하기로 했다. 아침에 알마티 한국교육원을 방문했다. 한국정부에서 재외동포에게 지원하는 기금으로 운영하는 교육부 소속 교육기관이다. 한국에서 파견한 정 원장님과 카자흐스탄에서 살고 있는 우리 교민들과 조선족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려인에게 한국어와 문화 알려
고려인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알리는 문화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직원 31명 수강생 1400명을 교육시키고 있어 우즈벡 공화국에 이어 중앙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가지고 있다.
알마티 한국교육원을 나와 숙박등록을 하러 출발했다. 카자흐스탄은 초청기관의 레터(Letter)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떠날 때 시간이 없어 급행으로 여권을 만드느라 기다리며 받아 가지고 올 시간이 없었다. 알마티에서는 외국 여행객들이 체류할 때 숙박등록을 할 수 있는 3곳의 호텔이 있는데 다른 곳에 자더라도 여기서 체류했다는 숙박등록증(Registration)이 있어야 한다. 카자흐스탄 호텔에 도착하여 돈을 주고 숙박등록증을 요청하니 초청기관의 레터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다시 여권을 낸 알라모 초청기관에 연락해서 그곳을 수소문하여 찾았다.
카자흐스탄은 러시아 연방에서 탈퇴하여 자유주의 경제로 편입되었다고는 하나 옛 러시아 연방체제의 시스템을 거의 간직하고 있는 전형적인 관료주의 사회이다. 외국인들이 활동하기에는 많은 제약조건이 있는 곳이다. 숙박등록증이 없어서 공항에서 출국을 못하고 되돌아 온 미국인도 있었다는 김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중국에 비해 훨씬 더 경직된 사회라고 생각되었다. 이 시스템에서는 외국인 방문객이 지정된 호텔에 숙박하지 않을 경우는 불법이기 때문에 벌금과 함께 그에 상응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한다.
알마티 한국교육원 정 원장님도 어제 공항에 내린 우리나라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비행기도 늦게 도착한데다 비까지 내리는 상황에서 공항출입구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직원이 못 들어가게 하여 주먹이 오가는 사고가 발생하고 집단서명으로 항의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직원이 잘못했더라도 이곳의 문화나 관습은 공무원들이나 관청을 잘 알아서 처리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11시 30분 경 알람(Alam)에 도착하여 15$의 수수료를 주고 레터(Letter)나 숙박등록증이 필요 없는 72시간 이내 출국할 수 있는 증명서를 발급 받았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만든 여권 기간이 중국대륙을 경유하면서 일정이 늦추어졌고, 출국 때 발급 받은 한 달간의 기간이 현지와는 차질이 생겨 이곳을 빨리 떠나야 할 형편이 되었다.
알마티기차역에서 저녁 6시에
출발하는 친켄트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이곳에서는 기차표마저도 외국인의 경우 여권을 제시해야 끊을 수 있다. 옛 소련 연방 공산주의 체제의 잔재를
조금씩 체감하기 시작했다. 김 선생과 함께 카자흐스탄 근교의 농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친케트행 기차를 타기까지 5시간의 여유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