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에서 왕건을 찾자
천안에서 왕건을 찾자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6.07.05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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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조한필 부국장(내포)

고려 태조 왕건은 천안을 여러 번 들렀다. 천안이 최종 목적지일 때도 있었지만 이곳을 거쳐 충북 보은·문의(이상 932년), 예산(934년) 등 다른 곳으로 갈 때도 많았다.

한 번은 천안 직산읍 수헐리를 지날 때였다. 인근 산을 가리키며 “오색구름이 둘러싸여 성스러운 산신이 있을만 하다”며 산 이름을 성거산(聖居山)이라고 직접 지었다. 이후 산기슭에 천흥사(天興寺)가 지어지고 현종 때는 천흥사 동종(국보)이 주조되는 등 이곳은 고려 왕족의 주요 사찰로 관리됐다. 성거산이란 이름은 현재까지 1000여 년 동안 불리고 있다.

천안에서 왕건의 흔적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유적, 유물은 남은 게 없다. 왕건은 지명과 설화 속에 존재할 뿐이다. 이 때문인지 지금껏 천안시는 왕건에게서 시 유래를 찾는 데 소홀했다. 천안의 진산인 태조산 이름이 태조 왕건에서 비롯된 것조차 모르는 시민이 많다.

지난달엔 천안 목천읍에서 왕건 얼굴로 추정되는 동상이 발견돼(본보 6월 20, 22일자 16면 보도) 더욱 천안과 왕건의 연관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만간 문화재청이 조사를 진행할 예정으로 왕건상 여부가 가려질 것이다.

지난해는 한림대 김용선 교수가 소개한 직산현 출신 최홍재(?~1135) 묘지명이 천안과 왕건의 관련성에 새 사실을 보탰다. 직산(稷山) 이름이 최홍재의 고조 할아버지 때문에 왕건이 지어준 지명이란 것이다.

묘지명 첫 머리에 “고조는 삼한공신 삼중대광 양유(良儒)로 직산현 사람이다. 처음 태조가 통합할 때 양유가 같이 한마음으로 도와 공을 이뤘다. 태조가 순행하여 이 현의 북악에 이르러 양유가 사직을 지켰다고 하여(社稷之衛) 이름을 직산이라고 하였다”고 적혀 있다.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도운 여러 지방호족 중에 천안 직산의 최양유도 있었던 것이다. 최씨 성도 그때 하사됐을 것이다.

930년 왕건이 후백제 공격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천안이라 이름 지어 신도시를 만들었듯이 종래 사산(蛇山) 지역을 후백제 통일 기여에 따라 직산으로 고쳐 불렀던 것이다. 왕건은 천안 이름은 물론이고 현재 천안에 편입된 성거읍, 직산읍 이름도 직접 지었다. 작명 이유도 모두 뚜렷하다.

왕건의 흔적은 천안 절이름에도 남아있다. 고려왕이 머물렀다는 뜻의 유려왕사(留麗王寺)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적어도 이 책이 편찬된 16세기까진 천안에 존재했던 절이다.

마점사(馬占寺)는 왕건이 말을 머물게 해 이런 절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목천읍 덕전리와 지산리 사이 마점 마을이 그 절의 존재를 확인해 준다.

또 왕건과 천안의 깊은 인연을 증명하는 건 왕자성(王字城)과 고정(鼓庭), 태조사당이다. 고정은 왕자산(현 태조산) 아래에 있던 군대 연병장이다. 고려 말에 지어진 시문에서 이 세곳의 존재가 명확하게 입증된다.

천안을 세심히 보면 태조 왕건의 숨결을 여러 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런데도 천안시는 지금껏 왕건을 잊고 살아왔다. 역사 흔적을 쉽게 찾기 힘든 2000년 전의 백제시조 온조에만 매달렸다. 523m 산꼭대기서 왕궁을 찾으려 돈을 쏟아부었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반면 왕건과 관련이 깊은 천흥사터는 지금껏 방치했다. 석탑·당간지주가 보물로 지정돼도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나와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는 9월 초 천안시가 ‘왕건과 천안’ 학술대회를 열기로 했으니 뭔가 달라질 거란 기대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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