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활력을 주는 충무공
삶에 활력을 주는 충무공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6.06.14 1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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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조한필 부국장(내포)

지난 주말 고교 동창 6명과 1박2일로 거제·통영 여행을 다녀왔다. 이순신 장군을 뵈러 간 것이다. 여행 첫날인 11일 충무공이 첫 해전을 벌인 거제도의 옥포해전 전승지를 둘러봤다.

수년 전부터 이순신 연구에 빠져 사는 친구가 “옥포해전이 1592년 음력 5월 7일 벌어졌으니까 아마 지금쯤일 것”이라고 알려줬다. 그랬더니 다른 친구가 “그럼 바로 오늘(6월 11일)”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생일이 음력 5월 6일인데 양력으로 어제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400여 년 전 옥포해전이 있던 날, 현장을 들른 셈이 됐다.

장군은 기념관 앞으로 펼쳐지는 옥포만에 정박한 왜선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지금 그 자리는 대우조선해양이 만드는 배들로 분주했다. 조선소는 정상 가동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거제도 조선업이 풍비박산 났다는 뉴스를 잇달아 접한 터라 예사롭지 않았다.

이순신, 원균은 옥포해전에 함께 출전했다. 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때 동래가 이미 함락되어 왜적들이 계속 몰아쳐 곧장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대가가 이미 서로(西路)로 들어가자(선조 피난),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오고 다른 소식은 없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약속해 한산도에서 회합했다. 이때에 이순신이 전선 80척을 거느리고서 마침내 옥포 앞바다로 나아가니, 적선 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르고 기다란 장대를 세워 홍기·백기들을 현란하게 달았으며, 나머지 왜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마을 집들을 불사르고 겁탈하였다. 왜적들은 수군을 보고는 노를 빨리 저어 진지를 나와 아군과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

조선 수군의 첫 승리였다. 4월 13일 왜적이 부산포를 공격한 지 20여 일만에 얻은 첫 승리였다. 이순신과 원균은 함께 장계(전투 보고서)를 올리기로 했으나 이순신이 단독으로 장계를 올린다. 두 사람 사이 불화(不和)가 빚어진 일인듯하다.

지난달 23일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1시간 간격을 두고 옥포조선소를 찾았다. 조선업 불황 현장을 찾아 민심잡기 경쟁을 벌인 것이다. 이 경쟁이 이순신과 원균의 경우처럼 불화로 이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두 사람의 불화가 이순신의 삭탈관직과 백의종군, 칠천량 패전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거제도에서 배를 타고 15분 만에 한산도에 도착했다. 한산도는 1593년 8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했던 곳이다.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에서 옮겨와 왜적의 코앞으로 설치한 전진기지다. 5년간 통제영이 있었던 한산도 바다는 고요했다. 1593년 난중일기의 끄트머리, 한산도 바다를 바라보며 이순신은 그간 전투를 회상했다.

“진격을 외치며 서로 다투어 돌진해 싸우는 때가 되면, 사랑하는 처자를 돌아보며 살기를 탐하여 중도에서 빠지는 자가 있는가 하며, 혹은 공로와 이익을 탐하여 돌진하다가 적의 손에 걸려들어 마침내 나라를 욕되게 하고 자신의 몸을 죽게 하는 재앙을 맞는 자가 있었다.”

그리고 명세했다.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이 많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나아가 여러 장수의 선봉이 돼 몸을 바쳐 나라에 은혜를 갚으려는 데, 만약 기회를 놓친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충무공 연구자가 다 된 친구는 “그를 알아 갈수록 세상을 사는 힘이 난다”고 했다. 그 이유를 알 듯했다. 이순신은 비겁하지 않은 당당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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