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악몽
5월의 악몽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6.05.2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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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조한필 부국장(내포)


지난주 한 잡지가 공개한 전두환 전 대통령 인터뷰가 36년 전 악몽 같은 5월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누가 발포 명령을 내렸다는 거냐?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전 전 대통령이 다음달 나올 자서전 내용을 예고하는 말을 쏟아냈다.

정말 좋은 세상이다. 자신이 대통령일 때는 누구도 이 같은 ‘소신 발언’을 못했는데…. 많은 국민이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의 장본인으로 아는 상황에서 전면 부정하는 말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

1980년 봄은 끔찍했다. 5·18의 참상을 겪은 광주 시민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당시 국민 모두가 끔찍한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그해 초 소문으로 무성하던 신군부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가을엔 대통령까지 오르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신군부로 불리던 반(反)민주세력은 79년 그들의 상관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하극상(12·12사태)을 벌이더니 역사 전면에 나타났다. 대학가는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부른 10·26사태 이후 휴교령의 오랜 침묵을 깨고 활기를 찾았을 때였다. 학도호국단이 사라지고 총학생회가 부활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을 장악하고 정부에까지 힘을 미친다는 얘기가 대학가에 퍼지더니 4월 16일 급기야 중앙정보부 서리까지 맡았다.

대학가가 술렁였다. 학교 곳곳에 전 보안사령관을 규탄하는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다. 검은 권력의 최정점으로 그가 지목됐다. 군인통치시대가 또 시작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찾아왔다. 대자보가 ‘전두환’ 이름을 ‘剪頭患(머리가 잘리는 근심)’으로 고쳐 썼던 것이 기억난다.

5월 들어 신군부 규탄 시위가 이어졌다. 14일 서울의 일부 대학 시위대는 학교 경찰 저지선을 뚫고 시내로 진출했다. 구경꾼 속에 숨어 있다가 급습하는 ‘백골단’(사복 진압경찰)을 경험한 것도 이때였다.

다음날 서울의 전 대학생이 교문 밖으로 나섰다. 이상하게 경찰이 교문 앞에서 모두 철수했다. 아무런 저지 없이 서울역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중앙청(지금의 경복궁) 가까이 시위대가 도착하자 수도경비사단 장갑차가 동십자각 앞까지 진출해 있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날의 대학가 연합시위는 경찰과 큰 충돌 없이 끝났다.

14, 15일 대학생 시위는 시민들에게 전두환 신군부의 무서운 음모를 일깨웠다. 군인이 민간정보기관(중앙정보부) 수장을 겸직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국민으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재빨랐다. 대학가는 16일 하루는 유신시대 종말을 알리는 ‘5·16 장례식’을 치르는 등 조용히 보냈다. 총학생회 간부들은 그날 저녁 이화여대에 모여 차후 운동방향을 논의하는 회의를 하고 있었다. 신군부가 이곳을 덮쳐 간부들을 체포하고 비상계엄령 확대와 함께 대학 휴교령을 내렸다. 이후 광주에선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강제진압이 됐다.

신군부 행보는 순조로웠다. 5월 31일 국가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어 대한민국을 장악했다. 위원장에 오른 전두환은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9월 ‘체육관 거수기 선거’(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됐다.

이런 폭력적 집권 과정을 지켜본 국민은 맥이 빠졌다. 왠지 모를 분노에 휩싸였다. 이후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게 됐다. 웃지 못할 일이 극장가에서 벌어졌다. 영화 예고편이 끝나고 본 영화 시작 전 ‘대한뉴스’가 나오면 많은 사람이 휴게실로 잠시 피했다. 맨 앞을 장식하는 ‘땡전 뉴스’가 보기 역겨워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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