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민 정치인' 박문수를 기리며 …
`위민 정치인' 박문수를 기리며 …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6.04.12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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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조한필

지역에서 중앙에 내세울 정치인을 뽑는 날이다. 옳은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만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 꼭 마음에 드는 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 지역과 국가를 위해 국회로 보내야 한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시민을 먼저 생각하며 일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위민(爲民) 정치인이 아쉬운 시대다.

천안시는 요즘 어사 박문수(1691~1756)의 위민정치 행적을 부각시키며 전국 공직자의 귀감으로 삼으려 한다. 북면 은석산 꼭대기에 있는 그의 묘 오르는 길을 정비하고, 박문수를 소개하는 스토리텔링판을 여럿 세웠다.

지난달 23일엔 중앙의 5급 승진자 195명이 고령박씨 종중재실과 박문수 묘를 찾았다. 법무부·대검찰청·환경부·해양수산부·대통령비서실 등 10여 곳에서 사무관 진급해 교육받는 공무원들이다.

천안시가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 지방행정연수원, 충남지방공무원교육원 등에 공무원 견학코스로 제안한 것이 결실을 본 것이다. 다음 달에도 300여 명의 공무원 견학이 예약돼 있다.

시는 박문수를 “흉년에 개인재산을 털어 백성을 구제했고, 암행어사 활동을 통해 지방관리나 토호세력들의 비리를 응징하는 등 백성을 아낀 위민행정갚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피상적 이해에 불과하다. 사재로 이재민들을 도운 적은 있지만, 그의 많은 위민 행적에 비하면 아주 작은 부분이다. 또 어사로서 비리 정치인 응징도 한 건 맞지만, 고급 관료로서 백성의 어려움을 찾아 해결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인은 항상 “국민이 나라의 근본이니 국민을 위해 정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말 만큼 실천은 따르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박문수는 겉과 속이 똑같은 위민 정치인임이 틀림없다.

영조 4년 1728년 3월이었다. 박문수가 영남어사 활동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며칠 후 청주성이 이인좌에게 점령당했다. 박문수는 반란 진압군의 부관(종사관)이 돼 안성으로 향했다. 며칠 후 반란은 진압되고, 이인좌는 생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어사로서 몇 달 전 들렀던 함양·거창지역이 반란에 휩싸여 많은 백성이 숨거나 피신해 떨고 있었다. 민심 회복이 급선무였다.

박문수가 혼자 말을 타고 선무(宣撫)활동에 나섰다. 누군가 군사를 거느리고 다니길 권했다.

그러자 그는 “(호위군사 대동은) 위태로움과 의심을 진정시켜 편안히 하는 방법이 아니다. 비록 뜻밖의 위험이 있을지라도 어찌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을 겁내겠는갚라며 거절했다. 이 때문에 이른 시기에 백성이 산에서 내려오고 피난에서 돌아와 생업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742년 함경도에 흉년이 들어 진휼사로 임명됐다. 황해도의 진휼미 조달이 늦어지자 왕에게 청했다. 혼자 말을 타고 함경도와 황해도를 오가며 곡물을 운반할 방도를 찾겠다는 것이다. 영조가 고위 관리가 그리할 순 없다고 말렸다. 그러자 “진정 백성에게 이롭다면 어찌 구구한 체면을 논하겠습니까”라고 대꾸했다. 영조는 위민정책을 펴는 데는 몸을 사리지 않는 그를 특히 아꼈다.

그에게 정치는 백성을 위한 것이냐, 아니냐는 기준만이 있을 뿐이었다. 실천하는 정치인 박문수는 영조 재위 53년 최대 치적인 균역법 시행 때도 빛을 발했다. 그는 백성에 부과되는 군포(布)를 전부 줄일 걸 주장했지만 이루진 못했다. 그러나 그가 제안한 소금세, 어선세 덕분에 부족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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