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자원 0순위 `박문수'
역사문화자원 0순위 `박문수'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6.03.22 1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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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조한필 부국장(내포)

지난 토요일, 어사 박문수(1691~1756)의 묘를 보러 천안 북면 은석산(455m)에 올랐다. 묘가 정상 가까이 있어 고령박씨 종중재실서 출발해 쉬엄쉬엄 1시간 걸려 도착했다.

천안시는 최근 은석산에 ‘어사 박문수 테마길’을 조성했다. 구본영 시장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남달랐던 박문수의 위민(爲民)사상을 널리 알리려 힘쓰고 있다. 묘에 오르는 길을 ‘능선바람소리길’ (팔각정 방향), ‘계곡물소리길’(은석사 방향)이라 이름 붙이고 이정표·벤치와 함께 박문수 생애 스토리보드를 각 방면에 세웠다.

박문수는 설화 속에선 부패 관료를 잡아내는 암행어사로 유명하지만 정작 어사 임무기간은 짧았고, 오랜기간 병조·호조판서 등으로 일한 실무형 관료다. 학계에선 박문수가 암행어사의 대명사가 된 것은 백성 고통을 덜어주려 노력한 그의 관료적 자세가 설화에 녹아들었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백성을 위하는 박문수가 암행어사로 내려와 우리를 구해줬으면…”하는 바람이 설화로 형상화됐다는 것이다.

능선바람소리길로 올랐다. 정상까지 2.5km 길이 팔각정을 앞두곤 가파르게 펼쳐졌다. 팔각정에서 잠깐 쉰 뒤 박문수 묘에 이르렀다. 묘 있는 곳은 해발 400m는 족히 되는 높은 곳이다.

별도로 승용차로 오는 길이 있어 6년 전 온 적은 있지만 걸어선 처음이다. “이 높은 곳에 왜 묘를 썼을까? 후손들 성묘오기 힘들게…”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은석산 일대는 박문수가 국가로 받은 토지(賜牌地)일 가능성이 크다. 원래 박문수 집안의 세거지는 경기도 장단이었다. 박문수 할아버지 때(청주 옥산)부터 충청도로 옮겨 묘를 쓰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논산의 윤증과 혼맥이 닿았고, 큰아버지(공주 반포)와 아버지(대전 유성) 모두 그의 제자였던 것이 인연이 됐을까. 할아버지 묘갈명도 윤증이 지었다.

전해오는 박문수 묘 이야기 두 개가 있다. 박문수는 직접 자기 묫자리를 찾으러 지관과 함께 다녔다. 먼저 은석산 지금의 자리를 본 후 산을 내려오다가 또 괜찮은 명당을 발견했다. 따라온 시종한테 “내가 여기다 정할 테니 너는 아까 그 자리를 가지거라”라고 했다. 그러자 시종은 “어떻게 소인이 대감 위에 있겠습니까? 저는 여기를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하는 수 없이 아래쪽 자리를 시종에게 줬다.

꼭대기 자리는 좋지만 손(孫)이 적은 곳이었다. 박문수는 병천장 세 번 자리를 옮기면, 묘를 은석사 절터 장독대로 옮기라고 유언했다. 직계 후손이 몇 번 끊기는 통에 장터가 세 번 옮겼어도 이장하지 못했다. 반면 경주 김씨 시종은 후손이 많아 집안이 번성했다고 한다. 종중재실 왼편 공터의 ‘경주김공휘일남지묘’ 푯말이 심상치 않게 보였다.

또 한 이야기는 묫자리가 장군지세인데 장군에게 군졸이 없어선 안돼 사람들이 모이는 병천장이 생겼다는 것이다.

박문수는 평택 진위 외가에서 태어났으나 무슨 인연인지 공주에 연고를 두고 서울에서 살았다. 그런데 정작 죽어 묻힌 곳은 천안이었다. 후손들은 몇 년 전 박문수 초상화(보물 지정)를 천안박물관에 맡기고 많은 고문서도 기증했다. 고문서에서 후손들이 은석산 일대 땅을 지키려 노력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박문수 자료와 그의 묘는 천안의 귀중한 역사문화자원이다. 영조가 아꼈던 실무형 관료, 백성이 사랑했던 암행어사. 박문수의 콘텐츠 경쟁력은 무한하다. 어떻게 차별화된 역사관광콘텐츠로 거듭 날것인가. 천안시와 시민들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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