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 새 사실과 방치된 오류
3·1운동 … 새 사실과 방치된 오류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6.03.01 1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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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조한필 부국장(내포)

어제는 97주년 3·1절이었다. 1919년은 한반도 전체가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가득 찬 한 해였다. 비록 일제식민지 아래 있었지만 우리 민족이 죽지 않았음을 온천하에 알렸다.

3년 후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데 아직도 새로 밝혀지는 사실이 적지 않다. 많은 오류가 바로잡히고 있다. 천안은 유관순 열사(1902~1920)가 아우내만세시위를 주도했던 곳이다. 천안선 만세시위가 아우내(병천)를 비롯해 천안읍내, 입장, 성환 등지에서 일어났다.

그 당시 천안서 있었던 새 사실이 최근 알려졌다. 종래 우리는 3·1운동에 천주교 신부는 참여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만세시위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주민 시위도 직접 도왔다는 것이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에도 기독교·불교·천도교 지도자는 있지만 천주교측 인사는 없었다. 조선천주교회는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며 3·1운동 참여를 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국 만세시위 현장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참여했다.

이번엔 외국인 신부가 주민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는 사실까지 밝혀진 것이다. 해방 후 첫 3·1운동 기념일을 맞아 동아일보가 1946년 2월 28일자로 꾸민 특집면에서 확인됐다. 주인공은 ‘외국인이 본 3·1운동’ 코너에서 증언한 당시 71세의 프랑스인 신부 공베르(한국명 공안국·1875~1950).

“25세 때인 1900년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로 3·1운동 당시… 천안읍에서 약 1리쯤 떨어진 어떤 촌락에 있었는데 석반(저녁식사)을 마치고 산보를 하노라고 뜰 앞에 왔다 갔다 하고 있었더니 촌락민이 몰려서 시위를 일으키고 있어 나(당시 44세) 역시 호응하여 대한 독립만세! 를 불렀더니 도락민이 나에게 몰려와 여러 가지로 지도를 받아갔다.”

무슨 지도를 한 걸까. “면장을 비롯해 읍내 유지들이 나에게 와서 저항방법을 물었다. 나는 ‘절대로 평화적으로 하되 금일 밤 등불을 있는 대로 들고 나와 질서 있는 시위를 하라’고 지도하는 동시에 마침 내가 갖고 있는 등불 삼백여 개를 내주며 성공하기를 축원하였다.”

그는 끝으로 3·1운동이 광복에 끼친 영향을 강조했다. “조선이 이같이 해방되어 독립이 약속된 것도 그 배아(싹)가 27년 전 조선민족이 심혈을 응집한 3·1운동이었다.” 공베르 신부는 당시 천안·진천 공소까지 관할하는 안성본당을 맡고 있었다. 공소(公所)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작은 교회다.

향토사학자 임명순씨는 ‘천안향토연구’ 2집(2015년 12월)에서 “공베르 신부가 시위에 참가한 곳은 천안 시내가 아니라 성환이었다”면서 “천안 공소는 성환 우신리에만 있었던 사실이 그걸 증명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공베르가 참여한 시위가 3월 31일 밤의 성환만세시위였다는 게 임씨 주장이다. 전국 유일의 등불시위였던 셈이다.

이렇게 새 사실이 밝혀지는데 한켠에선 오류를 수정하지 않고 있다. 88년 세워진 독립기념관 유관순 어록비의 뒷면 유 열사 약력에 많은 오류가 발견된다.

첫째, 출생연도가 틀렸다. 1902년으로 밝혀진 게 오래전인데 아직 1903년이다.

둘째, 유 열사의 형량. 공주재판소(1심) 7년, 복심법원(2심)서 원심 7년이 확정됐다고 했다. 그러나 수년 전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이 발굴돼 ‘1심 5년, 2심 3년’임이 밝혀졌다.

셋째는 유 열사 순국일. 종래 알았던 순국일(10월 12일)이 15년 전 발견된 유 열사 제적등본에 의해 9월 28일로 고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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