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 일기서 만난 기생 `부용'
암행어사 일기서 만난 기생 `부용'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6.02.02 1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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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조한필 부국장(내포)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잘 알던 사람을 만난 반가움이랄까. 최근 옛사람의 일기 속에서 반가운 여인을 만났다.

이름은 김부용(金芙蓉). 운초(雲楚)라는 호를 가진 기생으로 19세기 초 평양 인근의 성천에 살았다. 시를 잘 지어 그 명성이 한양까지 알려졌다. 350여 수의 시가 남아있다. “다채롭고 발랄하다”는 평이 어울릴 정도로 시에 재치가 넘친다. 황진이·이매창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생 시인으로 통한다.

그는 천안출신 원로대신 김이양(1755~1845)의 첩이 되면서 천안과 인연을 맺었다. 나이 30대 전후인 때로 추측한다. 그는 죽어 천안 광덕산에 묻혔다.

1974년 소설가 정비석에 의해 묘 위치가 밝혀졌고 천안문화예술계는 매년 4월 그곳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부용에 대해선 많은 연구가 진행됐지만 대부분 그의 작품과 창작정신에 관한 것이다. 그의 정확한 생몰연대, 양반가 딸로서 기생이 된 내력 등 궁금한 게 많다. 그런데 우연히 동시대를 살았던 한 암행어사의 일기(西繡日記)에서 그를 만난 것이다. 그간의 부용 연구에선 언급되지 않은 자료다. 고전문학 쪽에서 진행되다 보니 암행어사 일기까진 살피지 않은 탓이다.

1822년 음력 5월 5일 저녁이었다. 평안도 암행어사 박내겸(1780~1842)이 친구가 부사로 있는 성천 관아를 들렀다. 툇마루에 앉아 있자니 젊은 기생(少妓)이 다가와 한참 들여다보고 말했다.

“제가 겪어본 사람이 많습니다. 손님께서는 결코 궁하고 어려운 분이 아니신데 행색은 왜 이렇게 초라하신지요. 다시는 제가 선비님들 관상 볼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얼굴은 귀한 상인데 암행어사 신분을 감추려 입은 누추한 옷이 아무래도 이상했던 것이다.

박내겸이 말했다. “지나간 일이야 그렇다 치고 앞길에 좋은 바람 부는 시절이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자네에게 황금으로 집을 지어 주겠네.” 이 말에 부용이 뽀로통해 답했다. “옛말에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인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 얼굴을 꾸민다고 하였거늘…손님께서는 저를 속마음이 통하는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듯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학계에선 부용이 1800년 전후해 태어난 걸로 추정하고 있다. 일기도 ‘젊은 기생’으로 표현해 그 추정이 얼추 맞는 듯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박내겸은 부용을 처음 대했지만 명성은 익히 들은 상태였다. 부용에 대해 “일찍이 서울에 드나들었는데 귀한 집 자제와 높은 자리 명사들이 그를 데려다 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썼다. 그만큼 부용은 당시 이미 유명한 인물이었다. 20대 나이로 보긴 어려운 면이 많다.

박내겸은 대과 급제자로서 승정원·사간원 등 요직을 거친 중견 관료였다. 이런 40대 엘리트 지식인은 부용과 시문을 평하고 시 몇 편을 서로 나눈 뒤 “당대에 견줄 바 없는 재주꾼(眞絶代神才)”이라며 찬탄했다.

이후 박내겸과 부용은 세 번(6월 20·21일, 7월 16일) 더 만났다. 특히 마지막엔 부용이 성천에서 수십km 떨어진 중화까지 박내겸을 찾아왔다. “홀연히 밤에 찾아와 달을 보며 적벽부를 낭송하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이때의 부용을 20대로 보긴 어려울 것 같다. 광덕산 부용 묘의 안내판 생몰연대(1820~1869)는 더더욱 맞지 않는다.

하여튼 예상치 못한 기록에서 200년 전 부용을 만난 건 가슴이 떨리게 기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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