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평지 위례성' 찾기
천안 `평지 위례성' 찾기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6.01.26 2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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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조한필 부국장(내포)

온조는 기원전 18년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했다. 그 첫 도읍지 위례성 자리를 사학계에선 한강 유역의 서울로 보고 있으나 천안시와 천안향토사학계는 천안의 직산일대로 믿고 있다.

고려 때 발간된 삼국사기는 위례성이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했으나 삼국유사는 ‘지금(13세기)의 직산’이라고 밝혔다. 이후 조선시대 직산위례성설(說)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이 직산위례성설을 부정하고 한강유역설을 주장하자 근세들어 서울 인근으로 굳혀졌다. 풍납토성·몽촌토성과 백제계 삼국시대 옛 무덤들이 뒷받침했다.

천안에선 위례산 정상(523m)에서 산성 흔적을 찾아 이곳을 백제 첫 도읍지로 보고 몇 차례 발굴했다. 온조가 한산(漢山)으로 천도하기 전 13년간 이곳에 머물렀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 전 13년간 머물렀던 흔적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또 산꼭대기에 어떻게 도읍(都邑)을 만들 수 있냐는 비판이 거셌다. 이에 위례산성은 전란시 피난 가는 방어산성이고 도성(都城)은 거기서 가까운 평지에서 찾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평지성 찾기가 만만찮다. 천안에서 풍납토성·몽촌토성처럼 육안으로 드러나는 성의 흔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12월 말 평지 위례성에 대한 두 가지 주장이 동시에 나와 주목을 끈다. 단국대 이종수 교수(역사문화연구소장)와 장성균 선문대 교수(교양학부)가 각각 다른 위치를 비정(比定)했다.

이 교수는 ‘천안 안성천유역 문화유적 학술조사 보고서’에서 성환읍 안궁리 일대, 장 교수는 ‘백제초도 직산 오리곡 위례성’(천안향토연구 2집)에서 입장면 흑암리 일대를 주목했다. 모두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진 못했지만 평지 위례성을 찾으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두 사람 모두 안궁(安宮)리와 오리곡(오리골)이란 지명 자체에 주목했다. 안궁 지명에서 왕궁의 존재 가능성을 상정했다. 오리골은 어라하-오리골-위례골-위례성으로 음운 변천한 것으로 추정했다.

지명 이외에 위례성 추정 근거도 내놨다. 지형 특성을 중시했다. 안궁리는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성환천과 입장천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안성천과 합류하며 감싸 천연요새를 만들고 있다. 가까운 복모리에서 격자문 토기 조각이 나왔는데 ‘원삼국 또는 초기 백제시대’ 것으로 봤다.

오리골은 삼국사기가 밝힌 위례성 입지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동쪽에 위례산성(高岳), 서쪽에 아산방조제(大海), 남쪽으로 태학산까지 평야가 펼쳐지고(沃澤), 북쪽으로 안성천(漢水)이 있다. 이어 흑암리 마을에 있는 검바위를 거론했다. 검(儉)은 단군왕검의 검과 같이 통치자를 뜻하고 통치자가 큰 바위가 있는 곳에 주재하는 고대 유습에 따라 검바위란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산꼭대기서 도성을 찾던 무모함에서 벗어난 건 환영하지만 ‘13년 머문 도성’ 찾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뚜렷한 유적·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희박하니 음운 유사성에서 출발하는 추정만이 이어질 듯하다.

안궁리의 ‘궁’자는 조선왕실 전답(宮畓)의 존재에서 유래했다는 얘기가 있다. 맞붙은 팽택의 신궁리·평궁리와 같은 이유다. 검바위의 검자는 검다는 뜻, 즉 흑암(黑岩) 지명 유래와 연결될 텐데 달리 해석하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또 지형적 해석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옛 지명의 위치 비정은 힘들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근거를 내놓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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