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처분'이 있던 300년 전
`병신처분'이 있던 300년 전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6.01.0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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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조한필 부국장(내포)

알다시피 병신년이란 간지명을 가진 해는 60년에 한 번씩 돌아온다. 사람이 만 60세에 회갑(回甲)을 맞는 것과 같은 이치다. 조선시대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면 간지명을 붙여 그 해를 기억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처럼 말이다.

‘병신’ 접두어가 붙은 사건은 1716년 ‘병신처분(丙申處分)’이 유일하다. 당쟁이 한창이던 숙종 말년에 벌어진 사건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던 숙종이 윤증이 대표하던 소론 대신 송시열의 노론 손을 번쩍 들어준 일이다. 조선 후기 ‘노론 전제정캄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결정이었다.

숙종은 무려 47년간(재위 1674∼1720) 왕 노릇을 했다. 그의 아들 영조(재위 53년, 1724∼1776)에 이어 재위기간으로선 조선 27명의 왕 중 2위다. 숙종은 치세기간 노론, 소론, 남인의 손을 여러 번 바꿔 들어준 왕으로 유명하다. 노련한 숙종을 정치 국면을 자기에게 이롭도록 수시로 주력 당(黨)을 바꾸는 이른바 ‘환국(換局)정캄를 구사했다.

이런 숙종이 병신년에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2년 전 소론의 영수 윤증이 죽자 그는 “유림에서 그의 인품을 칭송했으며, 나 역시 그대를 흠모했소. 평생에 얼굴 한번 대한 일 없기에 아쉬운 마음 더욱 간절하구려”라며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1년 전엔 ‘가례원류’ 간행을 둘러싼 소론-노론 갈등 때도 윤증의 편에 섰다.

그런 숙종이 갑자기 노론 편을 들고 나선 것이다. 딱 300년 전인 1716년 2월의 일이었다. 판중추부사 이여가 송시열을 옹호하며 윤증을 비방하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노소분당의 단초를 열었던 송시열이 쓴 윤선거 묘지명, 윤증이 쓴 신유의서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송시열은 윤증의 부친이자 친구인 윤선거 묘지명을 성의없이 썼고, 이에 실망한 윤증은 스승 송시열을 비난하는 글을 썼다.

숙종이 잘라 말했다. “신유의서에는 송시열을 비난한 대목이 많은 반면, 묘지명에는 윤선거를 욕한 내용은 없다.” 소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청천벽력같은 ‘처분’이었다. 노론과 소론의 세력 균형에 종지부를 찍고, 노론 일당(一黨) 정치를 알리는 선언이었다.

사학계는 병신처분은 세자(경종) 교체를 원했던 숙종의 속셈이 담긴 조치였다고 설명한다. 숙종은 그렇게 좋아했던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더니, 그녀 소생인 세자까지 바꾸려 했다. 그런데 소론이 세자를 옹호했다. 소론부터 제거해야 했다. 병신처분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거란 해석이다.

이렇게 18세기 초반 팽팽히 맞섰던 노론, 소론 모두 충청도에서 출발했다. 송시열의 은진 송씨는 회덕(현 대전시 대덕구), 윤증의 파평 윤씨는 니산(현 논산시 노성면)을 기반으로 한 가문이다.

송시열·윤선거 모두 논산 연산면에 자리잡은 김장생·김집 부자(父子)의 제자였다. 인조반정 이후 정치판은 서인(西人)들 세상이었다. 이런 판세가 200여 년간 이어졌다. 조선 후기는 충청도 즉 호서 출신 정치인이 주름잡던 세상이었다.

이런 서인들이 요즘의 새정치민주연합처럼 자체 분열해 갈린 게 노론·소론이다. 어찌 보면 노소분당은 서인 일당독재를 경계하는 순기능적 요소를 지녔다.

충남도는 이런 호서유학 전통을 토대로 ‘충청유교문화권’ 설정을 위해 노력 중이다. 그런데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교문화권의 텃새로 난항을 겪고 있다. 병신처분이 내려질 때만 해도 국정의 본류는 충청도였는데 세상이 많이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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