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인 <가람 이병기 생가에서>
어린 시인 <가람 이병기 생가에서>
  • 이은희 <수필가>
  • 승인 2015.11.23 17: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이은희

태양이 정수리를 지날 무렵 가람 생가에 들어선다. 탱자나무 검푸른 잔가지들이 알기살기 수우재 지붕을 덮을 양 기어오른다. 왼쪽에는 결연한 의지로 서 있는 나목들이 모정 앞 연못에 반영되어 눈이 부시다. 붉은 꽃을 자랑하던 배롱나무의 시절을 떠올리다 뜰로 나선다. 순간 얼굴을 가릴만한 커다란 일본목련 잎이 발치에 두서넛 잎 떨어지며 나의 심상을 건드린다. 가을이 건너가는 소리인가.

세월을 먹은 고목들이 초가집 옛 정취를 돋보이게 한다. 가람 선생도 사랑채 창문으로 들어온 뜰에 내린 가을 정취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거나, 아니면 마당을 느릿느릿 거닐며 사색에 들었을지도 모르리라. 선생은 어느 곳, 어떤 대상에 시선을 주었는지 궁금하다. 먼 산 주름을 바라보았을까. 아니면 잎을 보내고 빈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투영된 연못일까. 아마도 탱자 향이 가득한 수우재에 정좌하고 고목의 탱자나무에 시선을 주며 대견스러워했으리라.

만추의 생가가 더할 나위 없이 고즈넉하다. 생가에 호젓이 나서길 잘한 일이다. 여럿이 왔다면, 아마도 왁자지껄하며 만추의 느낌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으리라. 팍팍한 일정에 다음 기행 할 곳으로 떠나느라 마음에 드는 광경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어려웠겠지. 가람 선생의 생애가 온전히 내게로 다가오는 듯 온몸에 전율이 감돈다.

빛바랜 모정(茅亭)에 올라 숨을 돌린다. “슬기를 감추고 겉으로 어리석게 보이라.”는 뜻을 품은 ‘수우재(守遇齋)’. 나의 녹록하지 않은 현실과 수우재의 뜻과 결부시켜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고자 한다. 일행과 함께 공유하지 못한 것에 외로움을 느낀 탓이다. 살아있는 동안 검박하고 청렴하게 생을 마친 선생의 뒷모습. 선생의 생애와 남다른 정신을 알고 나니 나의 소소한 감정은 투정이자 엄살일 뿐이다.

사랑채를 지나 안채로 접어든다. 멀찍이 떨어져 안채의 전모를 살핀다. 아담하다.

초가의 소박한 멋이 흐르고 남다른 위엄이 느껴지기도 한다. 기와지붕으로 올렸다가 원래 초가지붕으로 복원했단다.

전국에 문인의 생가가 많지만, 제대로 복원된 곳이 별로 없다. 명장의 손을 빌어 복원했다고 하지만, 세월의 때를 타지 않은 현대식 자재와 주변 도시환경과 작가의 생애와 일치하지 않는 듯 생소한 느낌이 드니 어쩌랴. 그런데 가람 생가는 선생이 살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초가집이다. 손때 묻은 문고리나 닳아진 댓돌이 정겹고 뜰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반긴다.

어린아이가 어디선가 달려나온다. 아이의 손에 쥔 가랑잎이 나의 시선에 박힌다. 초입에서 내 마음을 흔들었던 누렇게 물든 나뭇잎이다. 아이는 자신의 손바닥보다 더 큰 잎을 자신의 얼굴에 대보다가 잎을 허공에 높이 들어 큰 원을 그린다. 그러다 황새가 날개를 펴듯 두 팔을 벌려 바람을 타며 멀리 날아간다.

아이는 늦가을을 수수하게 즐기는 시인이다.

찬란한 죽음을 맞은 갈잎을 들고 있는 걸 보면, 아이도 가을이 건너가는 소리를 들었던가 보다. 나 또한 갈잎 낙화에 심상이 꿈틀거렸으나, 내가 품은 독으로 순수 감성은 발아하지 못하고 스러진 것이다. 아이의 행동은 몸으로 쓰는 시(詩). 계절을 머리로 알기만 하지 말고, 온몸으로 향유하란다. 어린 시인은 갈잎 한 장으로 고즈넉한 생가의 한 모퉁이를 빛내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