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걸으며 조선시대 역사의 숨결 느끼다
남한산성 걸으며 조선시대 역사의 숨결 느끼다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5.11.05 1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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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480m 산세 이용해 방어력 극대화 … 둘레 12㎞ 규모

암문·여장·옹성 구성… 항쟁물자 운반·성벽 보호 등 기능

인조 3년 행궁 건립… 조선 왕실 궁궐 대신 피난처로 사용

충청타임즈가 주최하고 청주문화원과 청주교육지원청이 후원한 역사탐방 ‘가족과 함께하는 세계유네스코문화유산 나들이’가 지난 1일 남한산성으로 첫 기행에 나섰다. 라기열 강사의 역사해설로 이채은 학생 등 40명이 참가한 이번 탐방에서는 남한산성에 얽힌 조선의 역사와 다양한 체험 행사가 진행됐다.

가족과 함께하는 세계유네스코문화유산 나들이

 

△ 가을 운치 속에 찾아간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자랑스러운 한국의 문화재입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의 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수치스런 역사의 현장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합니다.

이 남한산성은 언제 쌓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삼국시대로 보고 있습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이라고도 하고, 신라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어요.

이후 조선 시대에 인조와 숙종 때에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외성과 옹성을 갖춘 전형적인 산성으로 산성의 변화 과정과 기능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 떨어진 곳에 있는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둘레가 12㎞에 이르며 산 위에 도시가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였습니다.

또한 남한산성은 성곽을 쌓는 축성술 면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한국, 일본, 중국 사이에 광범위한 상호 교류가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이 기간에 유럽의 영향을 받은 화포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이런 무기 체계의 발달은 남한산성의 성곽 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 한양을 지키던 요새, 남한산성

성문은 성을 드나드는 주 출입구입니다. 성문은 출입에 편리한 지점에 방향별로 한곳씩 성문을 마련하는 것이 기본이었죠. 성문이 마련된 곳은 계곡이거나 능선이 안으로 휘어져 들어와 성문으로 접근한 적이 주변의 돌출된 지형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위치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암문(暗 門)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의 일종입니다. 이름 그대로 비밀스러운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일반 성문보다 작습니다. 암문의 기능은 성 내에 필요한 병기, 식량 등 항쟁물자를 운반하고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구원을 요청하거나 원병을 받고 역습을 하는 통로이기도 하지요.

여장은 체성 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고자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합니다. 여장은 다른 용어로 여담, 여첩, 치첩, 타, 여원 등이라고도 하고 고어로는 성각휘, 성가퀴, 살받이터 등으로 불렸습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정의되고 있으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모두 성벽에서 길게 내밀어서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현재 남한산성에는 5개의 옹성이 있어요.



△ 남한산성 행궁

행궁(行宮)이란 왕이 도성을 떠나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전란시·능행시·휴양 등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온양행궁 등 10여개 이상의 행궁이 있었습니다. 그 중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인조 3년(1625)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건립되었습니다.

실제로 약 10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7일간(1636.12.14~1637.01.30) 항전하게 됩니다. 이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이 여주에 있던 효종릉(寧陵)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습니다.

남한산성 행궁은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일반적인 행궁에 머물지 않고 유사시 임시수도의 중요한 역할을 하던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연지민기자

yeaon@cc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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