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이 탄생의 ‘큰 뜻’ 살리려면
천안이 탄생의 ‘큰 뜻’ 살리려면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5.09.01 1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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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조한필 부국장 <천안·아산>

주민소식지 ‘천안사랑’ 9월호에 ‘왕건이 만든 천안신도시’란 제목으로 처음 글을 썼다. 시민에게 천안시의 탄생 스토리를 널리 알리고 싶어서다. 

9월은 고려 태조 왕건이 1000여 년전인 서기 930년 ‘천안 신도시’를 만든 달이다. 신도시라고 말한 건 유력한 지방세력(호족)이 없는 허허벌판에 고을을 세웠기 때문이다. 

왜 왕건은 천안에 신도시를 만들었나? 왕건은 당시 최대 강적인 견훤의 후백제와 차령고개 등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다. 천안 넘어 공주와 홍성은 견훤이 차지하고 있었다. 

후백제 섬멸하기 위해선 수도 개성과 떨어진 전방 지역에 군사적 교두보가 절실했다.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목천·청주세력도 붙잡아둘 필요성도 컸다. 이래서 만든 게 천안도독부(都督府)였다. 도독부는 민정기능 외에 군사기능을 수행하는 관청이다. 

왕건은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후 몇 년이 지나 견훤과 자웅을 겨루는 운명적인 전투를 시작했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왕건은 930년 1월(음력) 안동전투에서 크게 이기면서, 내친김에 전주의 후백제를 멸망시킬 준비에 들어갔다. 그 포석이 천안도독부 설치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웅대한 뜻을 ‘하늘(천하)이 평안하다’ ‘천하를 평안하게 하겠다’는 천안(天安) 이름 속에 담았다. 현재 천안서 흔히 사용하는 ‘하늘 아래 편안한 도시, 천안’은 너무 좁은 의미의 해석으로 왕건의 큰 뜻 즉, 후삼국 통일 의지를 반영하지 못한다.

고려사 지리지엔 이런 내용이 있다. “동·서 도솔을 합해 천안부로 삼고 도독을 뒀다. 전하는 얘기로는 술사 예방이 태조에게 ‘삼국의 중심으로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지세(五龍爭珠之勢)이므로 큰 관리를 두면 백제가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태조가 산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고는 비로소 (천안)부를 뒀다.”

왕건은 드물게 천안에 중앙관리를 파견했다. 최측근으로 볼 수 있는 장인 황보제공을 보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부인(29명)을 둔 왕건의 네 번째 부인 아버지다.

신정왕후는 왕건과 사이에 아들을 뒀으나 일찍 잃고, 손자·손녀인 성종(6대)과 천추태후(7대 목종 모친), 헌정왕후(8대 현종 모친) 등 세 남매를 직접 길렀다. 천안도독부사 출신 아버지를 둔 할머니 때문에 손주들도 천안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았을까. 그런 이유에서인지 현종은 국보인 성거산 천흥사 동종을 주조했고, 성환 홍경사를 건립했다.

천안이 고려 초기 왕가와 깊은 인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왕건은 천안을 자주 찾았다. 한 번은 수헐원(직산 수헐리)를 지나다 멀리 오색구름이 걸쳐 있는 산을 보고 성스러운 산신이 산다며 성거산(聖居山)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천안은 그 이름을 1000년간 지켜오고 있다.

하늘 천(天)자를 몹시 좋아했던 왕건은 천안 이름 외에 천흥사(天興寺) 이름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천하가 편안해졌으니 이젠 천하를 흥하게 하겠다는 뜻을 담은 건 아닐까? 천안 주민들은 936년 왕건의 후삼국 공격을 위해 병력을 대고 군량미를 모으는 등 많은 노력을 폈다.

결국 그런 천안의 노력은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하는 게 크게 기여했다. 고려 말 이색의 부친 이곡이 천안을 ‘흥왕지지(興王之地)’ 즉 왕업을 일으킨 땅이라고 부른 이유다.

천년이 흘렀다. 우리 민족 최대 현안은 남북통일이다. 천안이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을 이룬 역사성을 살려, 남북의 평화적 통일에 기여할 방법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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