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끔한 요기
따끔한 요기
  •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 승인 2015.08.09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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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스크래치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노동이 없는 여가는 병의 원인이 된다. 이렇게 부르짖는 Y가 몇 년 전부터 자기 집에 한 번 다녀가라고 성화다. 4명의 문우가 그 성화에 못 이겨 점심초대를 받고 Y 집으로 갔다. 터덜거리는 비포장도로와 꼬부랑길을 자동차로 1시간 넘게 달려 도착하니 대문 옆의 진돗개가 순한 눈으로 꼬리를 살래살래 흔든다. 개와 인사를 나눈 우리 일행은 먼저 빨간 지붕을 한 이층집 앞에서 인증 샷을 찍었다. 요기부터 하라는 Y는 우리를 몰이라도 하듯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밥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삶은 감자와 옥수수 한 소쿠리, 복숭아 한 쟁반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밥상에 둘러앉아 감자를 먹으며 “간이 어쩌면 이렇게 딱 맞지”하며 한 모금 삼키고 서로 얼굴 한 번 마주 보고, 옥수수 한 입 뜯고 얼굴 한 번 쳐다보고, 복숭아 한 입 물고 “진짜 맛 하나 끝내주네” 하며 침을 삼켰다. 더 이상 목이 메어 음식이 넘어가지 않을 때는 따라 준 매실주로 목을 축였다. 김치 한 조각 없는 밥상 앞에서도 다들 무던히 앉아 인정으로 배를 채웠다. 우리는 차려놓은 음식을 맛으로 먹은 것이 아니라 성의를 생각해서 마음으로 먹고 주위를 둘러봤다. 

거실과 방, 2층은 책으로 가득하다. 어디에서 애절하면서도 야릇한 그리그의 페르귄트 중 솔베이지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책으로 둘러싸인 뒷방에 있는 오래된 턴테이블에서다. 뒷방에는 앉은뱅이 책상 위에 놓인 턴테이블과 벽에 기대어 있는 안락의자를 제외하고는 전부 책이다. 아마도 Y는 미로 찾기라도 하듯 시인이란 이름하에 고요가 주는 공간을 찾아 자신을 데려와 퍼덕거렸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만남은 성격, 성별, 나이, 장르 모두 다르지만 글을 쓴다는 공통점 하나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든이란 숫자가 무색할 정도로 정열적으로 사는 노 시인 Y. 가족과 떨어져 혼자 생활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한다. 오늘도 Y의 제안으로 글 한 편씩 들고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들고 온 작품을 논하고 그간 살아온 이야기와 개똥철학을 펼쳤다. 

Y는 일주일에 몇 번씩 문우들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며 용기를 북돋워 준다. 나름 바쁘게 사는 우리에게 귀찮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Y의 진정성을 인정하며 그냥 그러니 하고 넘어간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이곳저곳 구경하고 있는데 함께 있던 소설 쓰는 L이 언제 밖에 나갔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리다. 나가보니 파리만한 벌들이 떼를 지어 그의 주위를 앵앵거리며 날아다니고 L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다. 옆에 있던 K 시인도 나가 L과 함께 푸닥거린다. 내 옆에 있는 C는 벌에 쏘여 일주일간 고생한 경험담을 들려주며 구석으로 숨어든다. 나는 밖에서 장정들이 날뛰는 소리에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먹었다. 급기야 주인 Y가 살충제를 대량 발사하면서 사태를 수습됐으나 땡벌은 여전히 L 곁을 배회하고 있었다.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며 도망치듯 차에 오르는데 땡벌 한 마리가 내 입술을 찔렀다. “내 입술, 내 입술” 무의식 결에 소리를 지른 모양이다. 차를 타고 오는데 일행 중 한 사람이 박장대소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내 입술’ 하는 데 뽀뽀해달라는 소린가 싶어 얼씨구 하고 가까이 가려다가 차마 그 짓은 못하겠더라며 아직도 아프냐고 묻는다. L은 감자 1개와 복숭아 3개 먹으러 바쁜 일 제쳐놓고 여기까지 와 땡벌에게 30여 방 쏘인 것이 억울한지 병원에 누워서 땅문서 뺏던지 재산 가처분신청 해야겠다며 엄포를 놓는다. 

Y는 도시 생활을 하다가 팔았던 전지를 다시 사 부모가 살던 옛집에 살고 있다. 어머니가 잡고 지냈다는 재래식 화장실 문고리만을 남긴 채 리모델링해서 그곳에서 옛 추억을 그리며 농사를 짓고 있다.

Y를 보면서 우리는 관계 속에서 서로 소통하며 살다가 모천회귀, 공수래공수거의 인생 여정을 보는 것 같았다. 벌에 제일 많이 쏘인 L은 몸이 성한 데가 없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땅이라도 빼앗아야겠다고 큰소리친다. 그 옆에 있다가 나도 벌에 한 방 쏘였으니 묵정밭 한 뙈기는 내 것이 아니냐고 뜨거운 여름 폭소를 던지며 한 번 따져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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