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내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내 것이 아니었다
  • 최지연 <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15.06.24 18: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지연 교수의 교육현장
▲ 최지연 <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 교수>

내가 이른 봄에 
팔 위에 조카 안고 
벚꽃 구경할 수 있는 행복은 
원래는 내 것이 아니었다. 

60여 년 전 
먼 고향 땅 남겨 둔 
어머니 생각 가슴팍 주머니에 품고 
총구 불꽃보다 뜨겁고 빛나던 
이름 모를 젊은이가 
두고 간 행복이다
(중략) 

-청주신흥고 학생 유성식의 시-

2002년 6월, 대한민국이 붉게 물들었던 날, 더 뜨거웠던 그들이 있었다. 당시 신문이 전한 전투 기사의 첫머리는 이러하였다. ‘29일 오전 10시25분께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쪽 3마일, 연평도 서쪽 14마일 부근에서 남북 해군 간에 교전이 발생, 우리 해군 4명이 전사하고 1명이 실종됐으며 20명이 부상하고 우리 고속정 1척이 침몰했다.’ 

실은 나도 잊고 있었다. 뜨거웠던 2002년 월드컵에서 누가 언제 어떻게 골을 넣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꿈을 이루었는지는 기억하였지만, 별처럼 빛나던 누군가가 그리운 사람들을 품고, 그들과 누릴 행복을 남겨 두고, 나라를 위해 그 젊은 목숨을 내놓은 것인지 잊고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부상을 입었다는 박동혁 병장의 이야기 역시 기억 속에 어디에도 없었다. 

당시 수도병원 어느 군의관의 기록에 따르면, 참수리 357호 생존자 중 가장 많이 다친 채로 실려 온 박 병장은 의식이 없음은 물론 그 군의관이 군병원에서 목격한 환자 중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을 달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왜 그렇게 많은 파편을 맞은 것일까? 총을 쏘는 전투병은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로 사격을 하게 마련이지만, 부상병을 찾아 이동해야하는 의무병은 전투 시 가장 위험한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부상의 정도나 범위가 심하여 다리를 절단하고 관통상을 치료하고 회복하던 중에 세균감염과 폐혈성 쇼크로 2002년 9월20일 새벽, 84일간의 병상 사투를 마감하고 젊은 심장은 마지막 박동을 끝냈다고 한다.

상병으로 참수리호에 올랐던 그는 병장으로 일계급 특진하고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이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다. 국군 군의학교는 그를 기념하여 교정에 박동혁 병장의 흉상을 세웠다. 그리고 2010년 8월에는 제2연평해전 전사자의 이름이 차례로 명명된 윤영하급 유도탄 고속함의 6번 함인 박동혁 함이 진수되어, 다른 전사자의 이름이 붙은 고속함들과 함께 서해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오늘 아침을 평화롭게 맞이한 것도, 메르스를 걱정하며 아이에게 마스크를 씌우는 것도, 지금 내가 사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얻은 것임을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뜨겁고 뭉클해진다. 

시간이 흐르고 그 사이 정권이 수차례 바뀌면서 다시 6월을 맞았다. 한 기자는 그날의 전투를 전하며 이렇게 기사의 마지막을 쓰고 있었다. ‘우리 측의 대응 사격에 밀린 북한 경비정이 사격을 계속하면서 북측으로 돌아가 서해상의 격전은 25분 만에 막을 내렸다. 그 때가 오전 10시50분. 그 시각, 서울시청과 광화문 등에는 길거리 응원단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원래는 내 것이 아니었다. 그날 그 응원의 함성, 승리를 기뻐하며 함께 뛰었던 그 날의 기억은. 어느 숭고한 사람들의 기꺼운 자기 희생, 이 뜨거운 6월에 우리는 기억하고 기억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