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들
오래된 것들
  •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 승인 2015.04.02 19:2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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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희숙 <수필가·산남유치원교사>

친정에 갔다. 서랍을 여는 순간 십자수가 놓인 방석들이 웃고 있다. 엄마가 육십 년 전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만든 것이다. 그것을 혼수로 가져오셨다. 어렸을 적, 엄마의 정성어린 수가 담겨 있는 하얀 광목의 이불보와 책상보와 커튼이 집안 가득 있었다. 내 기억의 갈피갈피에 서려 있는 십자수. 수 놓여진 것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아슴하게 다가온다. 빨랫줄에 널려 하늘거리는 십자수가 놓여진 하얀 이불 홑청들, 그 사이를 가르며 깔깔거리고 뛰놀던 어린 시절의 동생과 나. 십자수가 놓여진 하얀 책상보, 그 정갈한 천이 깔린 책상 위에 알퐁스도테의 별을 펴놓고 읽어주던 오빠와 골똘히 듣고 있는 나. 언니 방 화장대 뒤로 바람이 불 때 나풀거리던 수 놓여 진 커튼, 그 아래서 화장을 하는 언니 그리고 언니를 쳐다보는 나. 

추억을 고스란히 갖고 가고 싶었다. 엄마에게 달라고 했다. 엄마는 그것을 어디에 쓰려고 그러느냐고 말씀하신다. 나는 우리 집 황토방에 갖다 놓고 귀한 손님이 올 때면 추억과 함께 내놓을 거라 말한다. 그러자 엄마는 장롱을 이리저리 뒤적이신다. 그 안에서 세월을 그대로 담고 있는 방석과 테이블보와 옷을 덮어 두었었다던 천도 함께 꺼내주신다. 엄마의 이십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광목으로 만든 것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가슴이 벅차오르고 뿌듯함이 밀려든다. 작고 노릇한 얼룩조차도 어떤 사연이 있을 듯하여 소중해 보인다. 요즘에 예쁘고 좋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것을 달라고 하냐고 말씀하시면서도 엄마는 내심 그것에 대한 추억을 곱씹는 느낌이다. 그것을 수놓으며 했을 생각들 그것을 완성하며 느꼈을 엄마의 행복감을 음미하는 듯 한참을 들여다보신다.

세상에 좋은 것은 많다. 돈만 내면 얼마든지 고급스럽고 깨끗한 것을 취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에는 추억의 냄새가 없다. 오래된 것에는 느긋하게 발효된 세월의 흔적과 추억들이 담겨 있다. 그것의 정서 값을 그것의 경제 값으로 환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래된 것들, 이야기가 있는 것들, 그런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그 오래된 시간의 깊이를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눈을 감아본다. 얼마 전 갔던 그곳이 스치듯 지나간다. 천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앙코르와트. 정지된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무뿌리가 사원을 감싸 에워싸고, 그 뿌리가 사원 속의 단단한 돌을 뚫는 시간이란 얼마나 아득하고 긴 것일까. 정지된 시간 속에서 그 까마득한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열대의 풍경을 보며 오래된 것에 대한 소중함을 생각해 본다. 

그것에는 낡음 이상의 의미가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사연과 웃음과 눈물을 담고 있는 것일까. 육십 년 된 방석으로도 그 많은 추억이 피어나는데, 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사원의 돌 하나하나 나무 하나하나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아픔과 슬픔과 기쁨이 녹아 있을까. 백 년도 못 살아본 내가 가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 거대한 세월의 무게 앞에서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한낱 흩날리는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다짐해 본다. 내려놓고 살자고. 저리 오랜 세월 모진 시간을 이겨낸 사원도 묵묵히 말없이 서 있지 않은가. 그저 말없이 흐르듯이 살자고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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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 2015-04-06 00:18:55
우리 엄마가 육십년 전에 한땀한땀 수놓은 거야

김준혁 2015-04-03 22:45:51
그래서 황토방에 그 천들이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