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종군길 복원 뜻 모으자
백의종군길 복원 뜻 모으자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5.03.17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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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조한필 부국장 <천안·아산>

지난 13일 아산 순천향대에서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路) 고증결과 보고회가 열렸다. 1월 말 이미 발표된 백의종군길을 어떻게 정비해 역사자원으로 활용할 것인가 논의하는 자리였다. 

아산·천안·공주·논산시 등 공무원과 전북·경남의 관계자가 참여했다. 백의종군로는 이순신이 1597년 음력 4월 1일 서울 종각에 있던 의금부에서 풀려나 3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는 8월 3일까지 120일간 그가 이동한 궤적을 말한다. 한곳에 열흘 이상씩 장기간 머물기도 하면서 640km를 이동했다. 그 가운데 전남(123km)·경남(161km)은 이미 정비돼 역사탐방로로 활용되고 있지만 서울~전북 구간 340km는 미고증 상태였다.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는 지난해 5월부터 8개월 동안 미고증 구간을 살폈다. 난중일기를 토대로 조선시대, 조선총독부의 각종 지도와 문헌자료를 참고해 이순신 동선을 확인한 후, 실제 걸어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아산 본가(현충사)에서 천안을 거쳐 공주·논산으로 넘어가는 충남도내 백의종군길도 밝혀졌다. 그런데 이날 보고회에 참석한 관계 시 공무원들은 백의종군길 복원과 역사탐방로 활용에 대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는 전언이다. 

이순신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아산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현충사 인근에 묘소도 있어 아산 일대는 이순신의 충절정신이 배어 있는 곳이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시 근무했거나 전투를 치른 전남·경남에선 백의종군길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한 지 오래다. 이제나마 그 길이 고증됐는데 충남도 및 시군 문화관광부서 공무원들은 “곧바로 실행하기는 어렵다”, “공감대 형성 후 지자체 별로 단계별 접근이 필요하다” 등 소극적 대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도민들이 원하는 답은 “좀더 확인 후 관계 지자체들이 충남도와 함께 복원·활용에 적극 나서겠다”이다.

이순신은 옥문을 나와, 나흘 후인 4월 5일 고향에 도착했다. 선산 조상님들께 절하고, 외가와 처가에 인사한 후 지인들과 회포를 풀었다. 그러던 중 13일 어머님이 작고하셨다는 비보를 접한다. 그러나 장례가 끝날 때까지 머물 순 없었다. 그는 19일 비통한 마음을 누르며 길을 떠난다. 난중일기에 그날을 이렇게 적었다. 

“맑음.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으며 곡했다. 어찌하라. 어찌하랴.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갉 금곡(谷)의 강선전 집에 당도해 강정·강영수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을 했다. 보산원(寶山院)에 이르니 천안군수가 먼저 와 있어 냇가에서 쉬고 갔다…아들 회, 면, 울과 조카 해, 분, 완이 천안까지 따라왔다… 일신역(日新驛)에 도착해 잤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하루 동안 이순신은 천안을 거쳐 공주에 도착했다. 아산시 신동, 남동을 거쳐 배방읍 신흥리(금곡)에 도착하니 강정씨가 문상했다. 광덕산 옆 망경산(해발 600m)을 넘어 천안으로 향했다. 넙치고개에서 한 숨 돌리고 천안 광덕면(보산원)으로 내려가 아들·조카들과 헤어졌다. 그는 17km 이 길을 말 위에서 울면서 이동했으리라. 이어 지장리(광덕면), 개치고개, 월산리(공주 정안면), 광정을 거쳐 일신역(공주 신관동)에서 하루 여정을 끝냈다. 

보고회 때 해사충무공연구회 정진술 자문위원은 “현충사~공주에 이르는 45km 구간은 도보 탐방의 최적 코스”라며 “아산·천안·공주시가 공동 개발하면 활용할 가치가 높아 꼭 살렸으면 하는 게 바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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