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의 교류
무수한 세월이 빚어낸 순백의 아름다움이여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남북 분열상황을 반영하듯 도자기 제조도 화북(華北)과 화남(華南)으로 크게 나뉘어 서로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갔다. 화북에서는 녹유도나 갈유도 같은 연유도가 성행하였고, 화남에서는 양이나 질 면에서 훨씬 앞선 청자나 흑유자(黑釉瓷)가 제작되었다.
당대 화북에서 당삼채가 주로 제작
당대(618~907)에 화남에서는 청자가 성행한 반면 화북에서는 도기인 백유도(白釉陶)나 흑유도(黑釉萄), 특히 당삼채(唐三彩)가 주로 제작되었다. 그런가 하면 하북성 임성현에서는 백자요지(白瓷窯址)가 발견되어 당대에 이미 백자도 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대 도자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당삼채이다. 당삼채는 납을 용매제(熔煤劑)로 하여 800도 정도의 저온에서 소성한 연유(鉛釉)도기이다. 그 색깔이 일반적으로 녹색, 다색(茶色), 백색의 3색을 띤다 하여 삼채(三彩)라고 하였다. 여기서 다색이라함은 적색과 황색의 중간색으로 홍색이나 황색 갈색이라고도 한다. 이 기본 3색 외에 남색이 끼는 경우도 있다. 당삼채의 형태는 크게 병, 단지, 술잔, 사발, 물병, 벼루 등 생활용품과 문무관, 마부, 악사 등과 용(俑), 그리고 말, 낙타, 소, 사자, 개, 토끼, 닭, 원앙새 등 짐승의 3가지 부류이다.
당 대에서 오대(五代)를 거쳐 송 대에 이르러 사회경제적 안정이 이루어지면서 도자기업도 크게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만당(晩唐)과 오대 때에는 월주요(越州窯)에서 이른바 비색청자(秘色靑磁)라는 양질의 청자를 만들어 냈다. 오대십국(五代十國) 가운데 하나인 오월(吳越)에서는 월주요를 관요(官窯)로 지정하여 국가가 관리하였으며, 후난(湖南), 장사(長沙)의 동관요(銅官窯)에서는 유하채도(釉下彩陶)라는 도기도 제조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부터 중국의 도자기가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일대로 수출되기 시작하였다.
송 대는 중국도자기 제조의 전성기로서 각종 질좋은 도자기가 선을 보인 것은 물론 관부의 대외교역 권장정책에 힘입어 주로 해로(海路)를 통해 세계 각처에 대대적으로 수출되었다. 월주요에서는 북송시대에도 여전히 청자를 다량 생산하였다. 원 대(1271~1368)에 이르러서는 전 대의 청자나 백자 외에 백자청화(白瓷靑花)나 백자오채(白瓷五彩) 같은 새로운 형식의 자기가 가미되었다. 명·청 대에는 유명한 경덕진요가 정부의 관리 하에 들어가 관요가 되는 바람에 제품이나 생산량이 엄격히 규제되고 경덕진 부근에 많은 민요(民窯)가 생겨나 자기의 생산은 계속 활기를 띠었다. 그 결과 명 청 대에도 경덕진 자기는 여전히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면서 세계 각지에 수출되었다. 도자기는 고대 오리엔트 문명기에 이미 출현하여 이집트계의 알칼리유도와 메소포타미아계의 연유도로 2대 계통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소재와 가공기술의 개발이 미흡하여 중국 도자기처럼 계속 발달하지 못하였다. 한편, 동방에서는 도자기 제작에 관한 한 제작기술이나 제품의 질, 특히 대외수출 면에서 중국이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은대를 시발로 3000년 간 부단한 노력과 독자적인 기술발달로 인하여 중국 도자기는 명실상부한 세계적 명품으로 8세기 중엽부터 주로 해로를 통하여 세계교역을 석권하였다.
일본·서아프리카까지 광범위하게 분포
중국 도자기유물은 동쪽 일본열도로부터 서쪽 아프리카 동남해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동남아시아로부터 서아시아 및 아프리카 동안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 곳곳에 중국 도자기가 널려 있었다. 그중에서 유물이 집중적으로 가장 많이 출토된 곳은 이집트의 푸스톼트 유지이다. 도자기 교류는 반드시 일정한 길을 따라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8세기 중엽에 이르러 동서교류사에서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하나는 도자기가 교류품의 대종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 비단이 동서 교류의 주종이었으나 8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 도자기가 대량 수출되기 시작하면서 도자기가 비단과 더불어 동서 교역품의 대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변화의 다른 하나는 실크로드 육로인 오아시스로에 비해 해로가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중세에 접어들면서 오아시스로 연변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세변화는 육로를 통한 교류를 어렵게 만든 반면 신흥 아랍-이슬람 세력이 해상에 적극 진출함으로써 해로가 미증유의 활기를 띠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조선술과 항해술이 급속히 발달하여 해로의 역할이 증대하고 급기야는 도자기로(陶瓷器路)가 출현하였다. 도자기의 경우 해운이 육운에 비해 안전할 뿐만 아니라 운반량도 더 많아 자연히 해운에 크게 의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해로의 역할 증대는 도자기의 교역 규모를 끊임없이 확대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중국 도자기가 해로를 통해 다량 반출됨으로써 중세 해로를 일명 '도자기로'라고 칭하였던 것이다. 이 '도자기로'야말로 중세 동서 교류의 중요한 통로였다.
유럽은 15세기부터 동방경략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당시로서는 진품인 중국 도자기에 큰 관심을 가지고 대량 수입했을 뿐만 아니라 도자기 제조소를 곳곳에 세워 중국 도자기를 모방하는 한편, 서구적 요소를 가미하고 융합한 서구식 도자기를 자체 생산하기도 하였다. 16세기 당시 중국 자기 1점이 7명의 노예와 맞먹었으니 대단한 귀중품이었다. 중국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계속 늘고 도자기 제조법까지 알게 되자 서구인들은 16세기 말엽부터 자국 내에 제조소를 세워 중국 도자기를 모방한 도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최초의 제조소를 세웠다.
오아시스로를 통한 비단이 동서교역의 중심을 이루어왔다면 중세 조선술의 발달로 인해 해로를 통한 도자기의 교류는 동서 문명 교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아시스로의 쇠퇴와 더불어 해로의 발달로 중세 아랍인들이 바다의 주역으로서 활발한 해상무역을 주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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