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정철의 또 다른 모습
드라마 속 정철의 또 다른 모습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5.03.0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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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조한필 부국장 <천안·아산>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 술잔을 잡거니 밀어 권하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에 맺힌 시름 다소나마 풀린다… 손님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버려라. 창공에 뜬 학이 이 골의 신선이라. 달 아래 행여 그 신선을 만나지 않으셨는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1536~1593)이 20대에 지은 성산별곡 일부다. 젊은 시절부터 풍류를 알고 술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다.

TV드라마 ‘징비록’에 정철이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 유성룡(1542~1607)보다 더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통상 인식하고 있는 다정다감한 시인이 알고 보니 ‘표독한’ 정치인이었다. 지난 1일 방송분에선 정철이 주색잡기에 빠졌다는 상소가 올라와 선조(1552~1608,1567 즉위)가 좌의정직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91년의 일이다. 정철의 나이 56세.

정철이 눈치 없이 40세의 젊은 선조에게 빨리 세자를 세우라는 진언을 했다가 밉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정철은 광해군(1575~1641)을 염두에 뒀으나 선조는 배다른 아들 신성군에 마음이 가 있었다.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유성룡과 함께 건의하려다 몸을 빼자 우직한 서인 정철이 혼자 나섰다가 된통 당한 것이다. 결국 그는 또 유배를 갔고 정치적 생명도 끝이 났다.

2년전 정철은 반대당인 동인 여러명을 정여립의 난에 엮어 죽음에 이르게 해 동인들의 원수가 된 바 있다. 그렇지만 선조는 그를 좋아했다. “정철은 그 마음이 곧고 행실은 바르나 다만 그 말이 곧아 당대에 용납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노라. 그가 힘을 다해 직무에 충실했던 점과 맑고 충직한 절의 때문에 초목조차 그 이름을 다 기억한다. 이른바 백관의 독수리요, 대궐의 맹호라 할 만하다.”

정철의 결점은 너무 곧은 것 외에 술이 있었다. 도승지(비서실장)였던 48세때 사헌부가 정철은 술 주정이 심하니 ‘자르라’고 왕에게 아뢴다. 결국 20여일만에 유성룡으로 교체됐다. 그는 몇개월 후 예조판서로 컴백했다. 사헌부가 또 판서 임명을 반대하고 나섰다. 술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첫해 음력 7월 전시 조정이 열렸는데 “영중추부사 정철은 술에 취해 오지 않았다”고 실록에 오를 정도였다.

그래도 이런 정철이 인간적이어서 좋다. 정적(政敵)에는 냉혹했지만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장진주사를 지은 낭만파 시인이 아닌가.

그가 죽자 왕조실록의 평가는 상반된 두가지였다. 반대당이 지은 선조실록에는 혹평, 서인이 지은 선조수정실록에는 담담한 평이 실렸다. 

혹평부터 보자.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하였다… 일에 대응하는 재간도 모자라 처사(處事)가 소루하였기 때문에 전라체찰사 때 인심을 만족시키지 못하였고… 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수정실록엔 이렇게 적었다. “강화에 우거하다가 술병으로 죽었다… 젊어서부터 재주가 있었다. 김인후·기대승에게 배웠는데, 기대승은 자주 그의 결백한 지조를 칭찬했다… 선조 초년 전랑(銓郞·요직)으로 기용되었는데 오로지 격탁양청(激濁揚淸)만을 힘썼으므로 명망은 높았으나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드라마에서 정철의 캐릭터가 너무 과격하고 편협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당시 서인의 영수로 당파 옹호에 매진할 때였다. 시청자들이 편견을 가질까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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