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생활도구 <53>
잊혀져 가는 생활도구 <53>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0.2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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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더께 지고 힘겨운 한 발 한 발
옛사진을 보면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어깨에는 긴 나무 막대기 끝에 나무통 2개를 단 지게를 걸치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는 모습이 있다.사진 제목을 보면 대부분 '북청 물장수'라고 씌여있다.

양반들과는 달리 산비탈이나 언덕에 집을 짓고 사는 서민들이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등 생활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해서는 물통과 물지게가 있어야 한다. 당시 수도시설이 보급 될리 없고 산비탈에 우물을 팔 수도 없으니 물을 구하기 위해 천상 언덕아래 멀리 있는 공동우물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다 먹었다.

그러나 물을 통에 담아 머리에 이거나 어깨 짐으로 옮긴다고 해도 비탈길을 오르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어서 돈 좀 있는 집들은 물을 사먹었다. 이때 나무판대기로 짠 물통에 물을 담아 높은 지대까지 물을 운반해 물값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주로 함경도 북청 사람들이라 자연스레 '북청 물장수'라고 부른데서 유래됐다. 사람이나 동물, 식물 등 이땅의 모든 생명체는 물이 없으면 생명을 이어갈 수가 없다.

식물은 흙속에 있는 수분을 먹고 자라고 동물들은 산속에 흐르는 물이나 강물 등을 마시며 산다.

사람들은 먼 옛날 양지바른 곳에 물이 솟는 옹달샘터에 집을 짓고 땅을 일궈 농사를 짓고 생활을 했다. 샘물이 좋으면 한 집 두 집 모여 마을을 이뤄 살았는데, 샘이 멀어지면 물을 운반할 도구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물통'이고 '물지게'다.

물지게는 나무로 등판을 짠뒤 멜빵을 달고 양쪽으로 나무를 길게 박은후 끝에 고리를 달면 된다. 함석으로 만든 물통에 물을 가득담아 양쪽 끝 고리에 물통을 걸고 어깨에 지고 걸으면 먼곳까지도 물을 운반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청주시 모충동 산높은 피란민촌에 살았던 필자도 새벽마다 모충동 쌍샘과 연배터 공동 샘에서 물지게로 물을 저나르던 경험이 있다.

눈이 내리는 겨울철에는 빙판길에 미끄러지고 장마철에는 옷이 흠뻑 젖어 물지게를 지고 다니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그시절 고지대 사람들은 물을 얻기위해 누구나 물지게를 이용했는데 6·25한국전쟁 직후 수돗물 공급이 제한 급수를 했기 때문에 낮은 지역에서는 쇠파이프를 땅속에 깊이 묻어 작두샘, 즉 펌프질로 물을 퍼올려 생활했다.

지금은 상수도가 많이 보급돼 청주시내에서 물지게를 지고 물을 길어다 먹는 사람들은 없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산간벽지나 섬지방에서는 아직도 물지게로 물을 길어다 먹는 모습을 종종 볼수가 있다.

또 농촌에서도 스프링클러나 물공급 모터가 발달되기 전에는 고추나 담배모 이식할때 물지게로 물을 길어다 고추모 구덩이에 물을 준뒤 흙으로 덮기도 했다.

물지게가 없던 옛날에는 아낙네들이 물동이나 자배기로 물을 길어다가 부엌 귀퉁이에 묻어둔 물항아리(물독)에 물을 가득채워 생활용수로 사용해 왔다.

물지게의 역사는 나무물통으로 시작됐고, 근대시대 석유가 보급되면서 석유를 담았던 네모진 양철통이 물통으로 변신, 무게가 크게 가벼워졌다.

나무물통은 자체의 무게도 무겁거니와 물을 담으면 나무가 물을 흡수, 무게가 배가되어 힘좋은 남정네들만이 사용이 가능했다.

서양문화가 들어오면서 함석(얇은 쇠철판)이 보급되고 함석을 둥글게 말아 제작한 물통이 전국적으로 폭넓게 보급되어 사용됐다.

무거운 물지게를 지고 언덕을 오르던 나이먹은 아주머니, 찰랑찰랑 걸음으로 물지게를 지고 달리던 총각 처녀들, 공동샘터는 새벽마다 붐비고 물깃는 것이 하루 일과중의 하나로 그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물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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