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하나, 그런 날이 언제 올까
여든하나, 그런 날이 언제 올까
  •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4.12.11 1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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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종의 함께 읽는 도덕경-땅에서 듣는 하늘의 노래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小國寡民(소국과민)에 使有什百之器(사유십백지기)를 而不用(이불용)하고 使民重死(사민중사)로 而不遠徙(이불원사)하니 雖有舟輿(수유주여)라도 無所乘之(무소승지)하고 雖有甲兵(수유갑병)이라도 無所陳之(무소진지)하며 使人結繩(사인복결승)으로 而用之(이용지)하나니 甘其食(감기식)하고 美其服(미기복)하며 安其居(안기거)하고 其俗(락기속)하여 隣國(인국)은 相望(상망)하여 鷄犬之聲(계견지성)이 相聞(상문)하니 民之死(민지노사)에 不相往來(불상왕래)하느니라.

- 나라는 작고 국민도 적으며 훌륭한 도구가 있더라도 쓸 일이 없고, 사람들의 죽음을 중요하게 여겨 멀리 쫓아낼 일도 없으니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고, 군인과 무기가 있더라도 전쟁을 치를 일이 없으며, 사람들은 다시 문자가 없이 살아가니, 음식은 입에 달고, 입는 옷은 아름다우며, 살아감이 곧 행복이어서 저마다 문화를 즐기며, 이웃 나라의 닭 우는 소리와 개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고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이리저리 옮겨다닐 일이 없더라.



= 小國寡民(소국과민)은 바로 지방자치가 제대로 이루어진 세상을 말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結繩(결승)은 문자가 생기기 전 나무에 끈을 묶어 숫자나 의사를 표시하던 원시문자를 의미하며, 什百之器(십백지기)는 수많은 사람의 몫을 하는 뛰어난 도구를 뜻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본문의 내용이 더 쉽게 와 닿을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동안 두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어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첫째로 떠오른 것은 이제는 좀 오래 지난 이야기인데,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한국에 왔을 때 했던 강연의 내용입니다. 그는 그 때 ‘인류는 아직 지구라는 생명공동체에 적응한 종(種)이 아니라’고 하면서 ‘인류가 지구 생명공동체에 적응하기까지는 일천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문학적 계산법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쉽게 와 닿는 내용이었고, 그래서 그가 쓴 소설 ‘개미’의 내용이 훨씬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일이 아직도 어제처럼 생생합니다.

인류가 지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직도 적응과정을 겪고 있고, 모든 현상들은 시행착오의 한 모습이라는 지적과 함께 떠오른 것은 무지막지한 중장비를 포기하는 날이 언제일지를 헤아리게 한 일입니다. 지구를 깨뜨리고 파헤치며 더럽히는 것으로 삶의 모든 편리를 추구하고 있는 모습이 베르베르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도 쉽게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이 없어 보이는 덴마크의 사회보장제도였습니다. 지난 여름 북유럽에 갔을 때 내가 보고 들은 덴마크 사회는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는 나라, 크지도 않으면서도 공업과 농업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고, 정치는 권력이 아니라 사람들의 안락하고 쾌적한 삶을 조율하는 역할 이상을 하지 않는 곳이 그 사회라는 것이 짧은 시간 내가 보고 느낀 덴마크 사회였습니다.

나라가 작아서 통치에 복잡한 논리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닭과 개의 소리가 이웃 나라에도 들릴 정도이고, 좋은 도구가 있더라도 굳이 그것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 게다가 여기가 아닌 다른 데를 굳이 찾거나 그리워할 필요도 없는 세상이 바로 옛늙은이가 꿈꾸는 세상인 까닭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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