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다섯, 생명윤리와 생명선언
일흔다섯, 생명윤리와 생명선언
  •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 승인 2014.10.30 1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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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종의 함께 읽는 도덕경-땅에서 듣는 하늘의 노래
民不畏死(민불외사)면 奈何以死懼之(내하이사구지)이겠는가 若使民常畏死(약사민상외사)면 而爲奇者(이위기자)를 吾得執而殺之(오득집이살지)라도 孰敢(숙감)이겠는가.

常有司殺者(상유사살자)는 殺(살)이니 夫代司殺者殺(부대사살자살)을 是謂(시위)로 代大匠斲(대대장착)이니 夫(부)로 代大匠斲者(대대장착자)는 希有不傷其手矣(희유불상기수의)니라.

-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어찌 죽인다고 을러댈 수 있겠는가. 만일 사람들에게 늘 죽음을 두렵게 한다면 이 몹쓸 짓을 한 자를 내가 잡아서 죽일 수 있다 하여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언제나 죽이라고 시키는 자가 있어 죽이지만 무릇 죽이라 시켜 죽이는 짓을 일러 남이 할 거친 일을 대신 하는 것과 같으니 대체로 남이 할 거친 일을 하다가는 제 손을 다치지 않는 이가 거의 없는 법이다.-



언뜻 읽으면 뜻이 쉽게 와 닿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두고 사람을 위협하거나, 그 두려움을 갖게 하여 제가 지니고 있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짓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계하는 말이라고 큰 윤곽을 잡으면 모든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볼 때 殺(살)이라는 글자는 ‘죽인다’고 풀 수도 있지만, ‘죽인다고 하면서 남에게 위협을 가하는 짓’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大匠(대장착)은 ‘나무를 찍거나 깎아 다듬는 일’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그냥 ‘거친 일’이라고 풀었다는 말과, 希有(희유)는 ‘드물게 있다’고 직역을 할 수도 있지만 ‘거의 없다’는 풀이가 더 원문의 뜻에 가깝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근원입니다. 살고자 사는 욕구가 생명현상의 기반인데 죽음, 또는 죽이는 행위는 그것을 꺾는 것이고, 생명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 전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도덕경에서는 죽이는 짓과, 죽이게 하는 모든 것이 죽는 당사자만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이거나 죽이라고 시킨 이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의 피해가 간다는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일 것입니다.

이 말을 좀 더 들여다보면 형벌을 통해 사람들을 교화(敎化), 또는 교육할 수 있다고 하는 태도가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도 보입니다. 모두가 언젠가는 죽지만 그 죽음을 가지고 살아있는 사람, 또는 생명들을 주무르려고 하는 짓의 위험성이 여기서 경계되고 있다는 것, 인권의 배경에 생명권이 있다는 것까지도 오늘 읽은 가르침 안에 담겨 있음도 이쯤 되면 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것이 다 상품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현대 상술의 극단적 모습이라는 것을 모를 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상품이거나 상업적 도구나 목적을 위해 이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생명권입니다. 물론 이 생명권이 도처에서 훼손되고 오염되며 왜곡되는 것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시장에 내놓는 순간 이미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代大匠斲(대대장착)의 상황이 도처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 이것이야말로 위기 중의 위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는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두가 공범(共犯)인 상황에서 우리가 놓인 현실을 똑바로 보고, 정직한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될 터, 생명윤리에 기초한 생명선언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라는 것까지를 말하고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접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풀 -

/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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