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63>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63>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0.17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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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행 기차(Ⅱ)

함 영 덕 <시인·극동정보대 교수>

곱디고운 휘황한 자태 그 오묘함에 빠지다

▲ 왼쪽부터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남부의 타림분지 가운데에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산들. 하샤크족의 파오 아극황배(阿克荒培)에서 팡유군과 헤어졌다. 중국의 신세대 젊은이를 만나 기차 안에서 컴퓨터 디스켓으로 한국 영화를 보면서 매우 즐거운 밤을 보낼 수 있어 퍽 인상적인 여행이 되었다. 컴퓨터의 급속한 발달로 세계의 젊은이들이 비슷한 문화적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막의 한 가운데서 더욱 실감할 수 있는 밤이었다. 팡유군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한류의 열풍이 타클라마칸의 한 가운데서도 살아 숨 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 부부를 보았다. 이 도시는 녹지조성에 매우 공을 들이는 것 같다. 하루 낮과 밤을 달리면서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을 처음 보니 희귀한 동물 보듯 신기하다. 멀고도 험한 사막을 뚫고 동서교류를 시작한 인간의 무한한 의지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불모의 사막을 낙타를 타고 여행한다는 건 목숨과 맞바꾸는 모험이다. 죽음과 맞바꿀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에 낙타를 몰고 이 산영의 기슭을 따라 건넜을까. 텐산 산영의 겹겹이 층을 이룬 산맥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햇살을 쬐이고 있다. 눈썹을 곤두세운 채 붉은 이빨과 이글거리는 태양에 가슴을 드러내고 허물어진 발톱으로 사막을 바라보고 있다. 오전 11시 40분 푸른 초원의 무성한 풀들이 자라고 있는 들판을 지나고 있다. 수천 마리의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음직한 초원의 작은 간이역 오도반(五道班)역에 잠시 정차하였다. 들판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초원이다. 작은 간이역에서 한 시간 정도 더 달리자 가끔씩 천연색 칼라로 듬뿍 칠한 텐산 기슭의 산들이 스펙트럼 같은 장관을 연출한다. 한 덩이 진흙 무덤 같은 산조차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상을 연출하는 것은 삭막한 사막지대에서 지루함을 달래주는 환타스틱한 경관이다. 화려한 드레스를 벗어버리고 알몸에 보디페인팅을 다양하게 그려 놓은 여인의 속살 같은 살갗을 아득한 지평선 너머로 바라보면 마치 환상적인 세계 속을 꿈을 꾸며 달리는 듯한 기분에 젖게 된다. 카스(喀什)에 도착할 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침부터 5시간 내내 사막만 바라보니 피로와 졸음이 몰려와 잠시 눈을 붙였다. 잠에서 깨니 푸른 목초지대가 펼쳐지고 저 멀리 수목이 아스라이 시야에 들어왔다. 과수원과 옥수수 밭이 펼쳐지는 오아시스 마을 아투스(阿什)역에 도착했다.

 호탄 왕국의 비단전례와 비단의 서전

비단의 원산인 중국에서 양잠의 역사적 근원을 찾아보면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회남왕(淮南王)의 '잠경(蠶經)'에는 황제의 원비(元妃) 서릉씨(西陵氏)가 양잠을 권장하고 친히 잠업을 개창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바로 여기에 전거를 두고 중국인들은 서릉씨를 잠업의 시조로 인정하여 대대로 제잠(祭蠶)의식까지 치르면서 그녀를 기리고 있다.

전설로만 알려졌던 삼황오제의 양잠견직 전승설은 근래에 와서 선사시대(신석기 시대)의 견직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어 그 실체에 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선사시대를 지나 은. 주의 역사시대에 접어들면 양잠이나 견직물의 실상을 유물이나 기록에 의해 확연히 입증된다. 여러 가지 고문헌기록과 출토유물로 미루어 보아 양잠은 중국에서 최초로 신석기시대 후기에 출현하였고 청동기시대인 은. 주대에 이르러서는 견직업이 일정한 규모를 갖추고 보편화된 일종의 수공업으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말하자면 중국은 3천여 년 전에 처음으로 누에를 길러 비단을 짠 나라이므로 양잠과 비단의 시원을 중국에 두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비단은 세레스인의 머리카락에서 유래

비단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치의 대명사로 세상의 온갖 직물들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고상한 천으로 통한다. 비단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사에타 세리카(saeta serica)',즉 '세레스(Seres)인의 머리카락'에서 유래하였다. 비단이 정확하게 어디서 기원했고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던 당시의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은 상상으로 '세레스' 혹은 '세레르(Serer)'라는 민족을 만들어 내서 그 민족을 이 독특한 비단을 만든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세르라'는 말이 원래 중국어의 비단을 뜻하는 사(絲)에서 나온 것이고, 세레스인이란 결국 중국인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나중에 가서야 밝혀졌다. 그러나 당시 그 먼 나라에 대해서는 출처 불분명한 문헌과 소문만 난무했던 까닭에 로마인들은 서기 1세기까지 비단이 나무에서 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중국과 로마는 서로에 대해 잘 몰랐을 뿐 아니라 두 나라를 사이에 두고 온갖 형태의 진귀한 물품들 특히 값비싼 비단이 오가던 실크로드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였다. 중국의 국경지대와 로마제국의 전초기지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양국이 다 무관심했다.

자신들의 영토 밖에 사는 야만인들의 땅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동서에 위치한 로마와 한제국 사이의 직접 교류가 이루어 지지 않은 것은 역사적으로 특이한 사건이다.

중국은 비단을 발견한 이후 수천 년 동안 비단제조 기술의 비밀을 엄격히 지켜왔다. 그로인해 비단무역에서 독보적 우위를 차지하는 세계무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경우였다. 비단 제조에 있어 중국이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기밀로 유지된 누에 사육기술과 실을 잣는 가공 방식의 섬세한 기술에 있었다. 당시 중국의 황제를 비롯한 신료들은 비단의 가치를 알아차리고 비단제조 비법을 누설하는 자에게는 사형을 내린다는 극형을 선언하였다. 비단의 소재가 되는 물품을 나라 밖으로 반출하는 것도 엄격히 금지하였다.

타림분지 변두리에 있던 호탄 왕은 오래 전부터 비단의 비밀을 풀고 싶어 했다. 자신의 왕국을 단순히 비단을 통과하는 지역이 아니라 비단을 생산하는 나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중국의 관청과 첩보대는 뽕나무 종자와 누에 애벌레가 국외로 반출되는 것을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하고 있었기에 중국 내에서 이것을 입수하였다 하더라도 중국 국경수비대를 통과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호탄 왕은 한 가지 묘책을 생각해 내고는 중국 황실에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청을 올려 중국 황실은 그 청을 수락하였다. 호탄 왕은 종자에게 공주를 데려오라 명하면서 '우리 땅에는 비단도 없고 뽕나무나 누에 애벌레도 없다고 말하고 비단을 계속 지어입고 싶으면 그것을 가져와야한다'는 말을 전해주라 일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어린 공주는 뽕나무 씨앗과 누에 애벌레를 머리 장식의 안감에 몰래 숨겨 국경을 무사히 통과하였다. 국경 수비대장이 직접 모든 짐을 수색하였으나 차마 공주의 머리 장식에까지는 손을 댈 수 없었던 것이다. 사치스런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던 한 공주 때문에 중국 비단에 대한 독점권과 비단제조 기술이 서방으로 계속 전해지게 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비단에 대한 독점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로마가 처음 비단을 접하게 된 것은 패배한 전쟁에서였다. 로마의 삼두정치를 펼치던 시기 집정관 크라수스는 기원전 53년 파르티아(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다. 사막으로 유인하며 후퇴하는 척하는 적군의 전술에 속아 매복해 있던 파르티아 군사들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파르티아군의 화려한 깃발에 우왕좌왕

화려하게 빛나는 깃발을 활짝 펴들고 기습을 하였는데 로마병사들은 파르티아 군사의 눈부신 깃발에 눈이 어질어져 우왕좌왕하다 순식간에 진용이 무너지면서 2만여 명의 병사가 죽고 크라수스와 그의 아들도 전쟁의 희생물이 되는 패배를 겪게 되었다.

화려한 색깔로 눈부셨던 군기가 바로 비단으로 만든 것이었다. 멀리서 전투를 바라보고 있던 로마의 척후병들은 그 깃발 때문에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생각하고는 그 깃발을 '세레스인의 깃발'이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10년 후 카이사르는 비단을 승리의 천으로 바꾸었고 비단으로 만든 깃발을 펄럭이며 로마에 입성했다. 심지어 우아하게 주름을 잡은 헐렁한 겉옷인 토가를 비단으로 입고 입성하여 로마에 비단을 전파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비단은 그 귀적적인 성격 때문에 늘 사치품의 전형이었다. 당시에 비단은 너무나 비쌌기 때문에 로마의 재단사들도 처음엔 비단을 단지 의상의 장식용으로만 사용했다. 로마의 상류계급은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기 시작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로마의 선남선녀들은 만져도 만지는 것 같지 않은 이 진귀하고 하늘거리는 비단 천에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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