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3, 후손들 항일투쟁도 치열했다
명량3, 후손들 항일투쟁도 치열했다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4.09.02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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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조한필 부국장 <천안·아산>

영화 ‘명량’ 때문에 아산 현충사에 때아닌 관람객이 몰리고 있다. 현충사에서 이순신 장군 생가 방향으로 걷다보면 오른쪽에 덕수 이씨 정려(충신·효자·열녀에게 내리는 문)를 모아 놓은 곳이 있다.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곳이다.

충무공 정려 외에 세개의 정려가 더 있다. 이완은 충무공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 참가한 그의 조카다. 무과 급제 후 의주부윤을 지내고 정묘호란(1627년) 때 청군에 패하자 불 속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5세손 이봉상. 이인좌의 난(1728년)때 충청병사로서 숙부 이홍무와 함께 잡혔다. 적도들이 항복을 권유하자 “네놈들은 충무공 집안에 대대로 충의정신이 전해지는 걸 모르느냐”고 질타한 뒤 죽음을 택했다. 이들 세명이 정려 주인공.

5년 전 충무공 후손들을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 취재 동행한 후손 이종흔씨(당시 73세·서울대 명예교수)는 어릴 때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왜적에게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이 너의 조상”이란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고 했다.

당시 일제강점기 4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나선 이규풍 가족을 보도했다. 이들도 다른 많은 독립운동가들처럼 교과서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처절한 항일 궤적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규풍을 중심으로 어머니와 그의 부인, 남동생과 제수, 아들과 손자 등 집안 전체가 맹렬한 항일전사였다. 이들 대부분이 만주 및 러시아에서 순국했다. 한집안이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났다.

규풍(1877~1931)은 안중근 의사와 가까웠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1909년 함께 손가락을 자르며 항일 단지(斷指)동맹을 결성했다. 한일합방이 되자 항일결사대를 조직했다. 러시아 당국에 적발돼 이르쿠츠크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임정 조직에 참여했고 내분이 일자 만주에서 좌우합작운동을 펼쳤다.

어머니 박안라(1853~1922)는 1907년 정미조약이 맺어지자 규풍·규갑 아들 형제로 하여금 의병에 참여케 한다. 규풍이 부모 봉양을 위해 고향에 돌아오려하자 거부하고 자신도 구국운동을 펼치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사망한다.

동생 규갑(1888~1970)은 임정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 상해한인청년단 서무부장 등을 역임한다. 이후 만주·러시아 국경지역에서 가족들과 항일활동을 함께한다.

부인·제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규풍의 부인 오세라(1875~1939)는 22년 아들 민호와 함께 연해주로 넘어가 남편의 독립운동을 돕는다. 남편이 숨지자 베이징으로 옮겨 항일운동을 계속한다.

이애라(1894~1922)는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교사 재직 중 규갑과 결혼한다. 임정준비 활동을 돕던 중 자녀를 업고 다녔는데 일본 경찰 검문에 달아나면서 아기를 떨어뜨렸는데 화가 난 경찰이 아기를 내동댕이쳐 숨졌다고 한다. 22년 임정 밀서를 갖고 국내 잠입하다 체포돼 순국한다.

규풍의 아들 민호(1895~1944)는 경성의전(현 서울의대)을 졸업한 의사다.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어머니, 부인, 아들 등 가족을 이끌고 연해주로 망명했다. 베이징 지하 항일활동 중 체포돼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 아들 3형제는 러시아·중국에는 독립운동 중 모두 실종됐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규갑은 68년 고향 아산에 고국에 묻히지 못한 가족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독립운동이 나라와 가문엔 큰 영광이었지만 일가에겐 너무나 참혹한 일이었다. 우리는 충무공은 물론이고 그 후손들에게도 많은 빚을 진 셈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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