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하루가 구겨지는 저녁
행복했던 하루가 구겨지는 저녁
  • 전영순 <문학비평가·수필가>
  • 승인 2014.08.10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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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순 <문학비평가·수필가>

갑작스런 기온차로 한바탕 쏟아놓고 가려던 매미의 연가도 할롱의 영향인지 아주 조심스럽게 노래한다. 매미의 울음이 뒤질세라 덥다고 푸념하던 우리들의 하열가(夏熱歌)도 자취를 감췄다. 한철 뜨거웠던 날도 시간 속에 묻혀 이젠 서서히 가을 채비를 하란다.

아직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는 여름처럼 내게도 며칠 전 휴가로 다녀온 씁쓸한 꽃게 이야기가 어쩌다 뚝 뛰어나온다.

아직까지 휴가 계획 한 번 뚜렷하게 세워본 적 없는 우리 가족은 남들 다녀온 휴가 이야기를 듣고서야 아, 우리도 어디로 다녀와야겠다는 땜방 식의 휴가를 떠난다. 남들 다녀온 휴가 이야기를 주워 모아 떠나는 여행의 맛도 제법 쏠쏠하다.

올 여름 휴가도 그렇다. 여름휴가 끝자락에 막둥이가 휴가가자고 재촉한다. 아이도 친구들 휴가 얘기에 귀가 솔깃했든 모양이다. 마음속으로는 아이들 데리고 계곡에 며칠 머물면서 래프팅하고 오면 좋겠다 싶었다. 생각은 생각에만 머물고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아이들에게 남들 흉내라도 내어 줘야겠다 싶어 무작정 동해로 떠났다.

산골 출신인 나는 산길을 좋아한다. 봉화에서 울진 넘어가는 36번 국도를 특히 좋아한다. 그 길을 달리다 보면 어릴 적 낭만이 살아난다. 산과 들을 지나다보면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소나무를 보면 힘이 불끈 솟아오르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비탈을 만나면 괜스레 숨이 차오르는 것 같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괴산 찰옥수수와 봉화 한우를 먹여서 인지 아이들도 기분이 꽤 좋아 보인다.

풋풋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불영계곡에서 먹는 복수박 맛은 산수와 어우러져 단맛에 푸른 맛을 더해 준다. 초록산이 풀어놓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수박물을 줄줄 흘리며 아그작아그작 불어보는 달달한 수박의 연주를 누가 들어본 적이 있을까?

아이들은 수박 맛도 계곡 놀이도 익숙하지 않은지 바다로 가자고 한다.

바다가 보이는 울진 아쿠아리움을 둘러보고 소나무가 우거진 공원을 거닐었다. 서해로 지나가는 나크리 영향으로 공원에 간간이 비가 내린다.

늘 혼자만의 시간을 원했던 나도 오늘 만큼은 가족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좋다. 고목이 된 금송의 향을 맡으며 눈을 감았다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나는 그저 이들과 공존하는 자연이다. 이 기분으로 공원을 벗어나 바다로 갔다.

해변이 조용하다. 자연이 우리 가족만을 위해 마련한 잔치판 같다. 드넓은 바다와 한적한 해변에서 오직 우리 가족만이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

지금 우리 가족은 태풍 나크리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수평선을 향해 고래감도 질러보고 파도에게 날 잡아 봐라 하며 달아나기도 한다. 달아나기 놀이가 지겨워지면 부서지는 포말을 밟으며 바닷바람을 맞는다. 밟고 지나온 발자국은 파도에 쓸려 물고기의 등을 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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