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고, 죽이고
살리고, 죽이고
  • 전영순 <문학비평가·수필가>
  • 승인 2014.07.2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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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스크래치
전영순 <문학비평가·수필가>

놀랍다.

불청객들이 내 작은 정원에서 수런거린다. 무던하기 그지없던 정원이 심상찮다. 내 눈으로 확인한 이상 차마 묵인할 수가 없다. 거미도 함부로 죽이지 못해 동거하고 있는 내게, 내가 허락한 영역을 침범한 그들을 단단히 마음먹고 퇴치하기로 했다.

우리 집 베란다에는 화분이 여러 개 있다. 나는 베란다를 하루에 한 두번 들락거리며 화초들을 슬쩍 훑어본다. 아파트 입주 당시 정원을 만들 수 있게 베란다에 공간이 마련되었다. 나는 그 공간을 창고 겸 평상으로 이용하기 위해 옆면과 위를 대나무로 꾸몄다. 위에 뚜껑을 만들어 물건을 넣었다 뺐다 할 수 있게 짰다. 화분은 평상과 안방 여닫이문 사이에 놓았다. 여남은 개 되는 화분은 주로 난과 키 작은 나무와 화초들이다.

입주하고 한참 동안은 평상 위에 올라앉아 커피를 마시며 창밖의 풍경과 화초들과 눈인사하며 다정한 나날을 보냈다. 따스한 봄날 반짝 피었다 지는 봄꽃같이 베란다에서 즐기던 낭만도 나를 그곳에 그리 오래 잡아두지 않았다. 베란다에서 즐기던 낭만은 그렇게 시시해져 갔고 다정했던 화초들도 내 관심에서 벗어났다.

가끔 친정엄마가 집에 들러 화분을 보며 “야야, 말 못한다고 이리 던져 놓으면 되나. 사람이나 식물이나 자주 들여다보고 하다못해 물이라도 줘야지” 하며 한심하다는 듯 우려낸 사골과 참숯을 구해다 화분 위에 올려놓고 가신다. 나는 엄마와는 달리 오래된 감자나 고구마에 싹이 나면 그냥 그 자체를 화분에 올려놓고 물만 어쩌다 준다. 올봄은 감자에서 감자줄기가 자라 베란다를 초록 세상으로 만들었다. 나는 자라나는 감자줄기를 천정에 달린 빨랫줄에 줄을 달아 이들이 타고 올라갈 수 있게 만들었다. 놀랍게도 튼실한 감자줄기는 손바닥만한 잎을 달고 세상을 초록으로 만들 기세였다. 그런데 오늘 내가 봐 왔던 베란다의 세상이 아니라 보지 못했던 세상을 접하고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빨랫줄에 빨래를 널고 있는데 종아리가 간질거린다. 작은 벌레 두 마리가 내 다리를 타고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기분, 아니 느낌이 오싹하다. 나는 일단 침착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먼저 다리에 있는 벌레를 수돗물로 하수구로 내보냈다. 그리고 주위를 살펴봤다.

감자 줄기를 타고 내려가니 싹이 났던 감자는 거푸집이 되어 있었고 그 주위는 온갖 벌레들로 난무하다. 이들을 그냥 살려주자니 그렇고 죽이자니 더더욱 그러하고 참 난감하다. 생각 끝에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어느 농약 회사 멸균 박멸이란 광고처럼 그냥 박멸하기로 했다.

끝까지 자신의 존재에 굴하지 않고 자존을 지키고 있는 감자의 세계를 바라보며 산다는 것과 종자번식에 대한 집착이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뿌리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는 불모지에서 끝까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무성한 초록의 정체, 텅 빈 거푸집 하나 안고 줄기를 튼실하게 키우려는 감자의 생명적 본질 앞에 내가 있다.

없었던 벌레의 정체는 언어학 구조에 있어 표면적인 파롤(parole) 안, 내면적인 랑그(langue)와 닮았다. 소쉬르가 말하는 무의식의 심층구조에 발화되지 않았던 인간의 언어구조라고나 할까. 감자의 존재가 사라지자 나타난 벌레들은 소쉬르의 언어구조와 같이 나타나는 지당한 자연의 법칙이다. 내 안에도 보이지 않는 생명체들이 무한히 존재하고 있는 자명한 사실 앞에 작은 우주 하나는 사회 속에서 세상 엿보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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