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연 <한국교원대학교 초등교육과 교수>

도서관 옆 잣나무 아래였다. 어스름 석양의 그늘 아래서 남자 친구가 여자 친구를 가만히 안아 준다. 공부가 힘에 겨웠는지, 삶이 무거웠는지. 가만히 서로를 안고 위로 받고 있는 어린 연인들. 연초록의 예쁜 연인을 보며 내 마음마저 따뜻해졌다. 사랑이다.

주말이면 멀리 기숙사에서 고등학생 딸아이가 집으로 온다. 딸아이 학교에는 유독 글쓰기 숙제가 많다. 일반적인 독후감 숙제면 딸아이도 어찌어찌 해치우겠단다. 받아오는 숙제는 ‘비악(非樂)’을 읽고 글에 드러난 묵자의 생각과 그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채용한 수사학적 기법을 분석하라든가, 지금 공부하는 ‘화학’ 과목이 자신의 진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써보라든가 하는 식의 생각 쓰기가 대부분이다. 딸아이는 머리를 싸매고 앉아 울기도 하고 고민도 하지만 결국 일요일 저녁에는 자신의 원고를 늠름하게 안고 학교로 돌아간다. 이번 주에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올까, 내심 주말마다 선생인 나는 딸아이 숙제를 기다린다.

이번 주는 역사 속의 ‘진정한 사랑’ 찾기였다. 소설 속 연인들의 구구절절한 사랑을 쓸까? 가족 간의 사랑을 쓸까? 큰 아이가 툭 끼어들어서 고대 희랍부터 따져보잔다. 그런데 작은 아이가 ‘그건 사랑 맞아?’ 볼멘 소리로 맞선다. 맞아, 그랬지. 고대 희랍에서는 그랬지. 교육의 원초적 형태는 파이데라스테이아 였어. 생각이 한동안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역사학자 앙리 마루는 그의 책 ‘고대교육사’에서 고대 희랍의 ‘파이데라스테이아’를 교육의 원초적 형태로 취급했다. 희랍어 단어 ‘파이데라스테이아(paiderasteia)’는 ‘아이’를 뜻하는 ‘파이도스(paidos)’와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 ‘에스테라스(esteras)’의 합성어로 축어적 의미로는 ‘소년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최소한 희랍에서의 교육의 원초적 형태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 사랑의 강력한 유대가 형성되어 있을 때 가능했다. 그 사랑이 어찌나 강렬했든지 마루는 플루타르코스의 말을 인용해 희랍에서의 폭군 암살사건의 상당수가 정치적 억압 그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투심 때문에 저질러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희랍에서의 ‘사랑의 유대’는 조금이라도 형식적인 교육이 시작되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 기저에 흐르는 교육의 원초적 세력에 대해서는 한번 되돌아 볼만하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희랍의 선생님은 젊은이들이 흠모하는 훌륭한 자질의 소유자였다. 선생님은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 더욱 훌륭해지려 노력하였다. 학생은 어떠했는가? 그 훌륭한 자질을 모범으로 삼고자 하는 학생은 선생님의 사랑에 부끄럽지 않은 인물이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사랑의 유대는 매우 강력했고, 이러한 유대를 토대로 희랍의 교육은 이어졌다. 지금까지도 우리 생각의 토대가 되는 희랍의 철학은 그렇게 전수되고 단단해졌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 알 수 없었던 무엇을 한 사람에게 깨우쳐준다는 것, 좋은 생각과 새로운 깨달음을 한 인간에게 전수하고 품게 만드는 것은 진정한 사랑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수많은 것들은 모두 그 고귀한 사랑에 의해 깨우쳐진 것이다.

일요일 저녁, 딸아이는 숙제를 들고 학교버스에 올랐다. 딸아이는 ‘외가에 갈 때마다, 우리 엄마에게 애호박 하나, 풋고추 몇 개라도 싸주고 싶은 외할머니의 마음’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썼다. 좋은 선생님은 그럴 것이다. 딸아이에게는 시골 친정 우리 엄마가 사랑을 깨닫게 해준 선생님이다. 사랑의 마음을 몸으로 온전하게 표현하셨으니 어린 손녀딸에게도 그 마음 구구절절 와닿았나보다. 가만히 뉘우쳤다. 나는 그런 선생인가.

글 내용 중 파이데라스테이아와 관련하여서는 이홍우(1999)의 ‘파이데라스테이아와 태교’를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