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찍고 가시겠습니다
잠깐, 찍고 가시겠습니다
  •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 승인 2014.05.25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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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스크래치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초록이 가득한 뜰에 햇볕이 따갑다. 한참 풋풋해야 할 얼굴들이 시들어 있다. 아니, 함박웃음을 터뜨리기 위해 잠시 묵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4월에 인간의 욕망과 태만이 얼마나 큰 참사를 불러오는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슬픔의 잔영이 말끔히 정리되지 않는 가운데 오월도 어느새 서서히 꼬리를 감추려 한다. 유월이 오면 우리 얼굴에 햇살이 피어났으면 좋겠다. 한 차례 휘몰고 간 물속 용틀임의 여파가 참 길게도 이어지고 있다. 때아닌 희망가나 계몽가라도 불러야 할까 보다.

세월호로 내우(內憂)를 잠재우기 위해 대한민국이 침묵하고 있는 사이 외우(外憂)가 생길 줄이야. 지난 19일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로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고 일부 정부 부처 관련 업무를 국가안전처로 이전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관피아의 척결을 위한 대책도 마련했다. 정부의 조직에 대해 문외한인 나지만 우리 해경이 잠시 손을 놓은 사이 남해안에 중국 조개잡이 어선이 꽃게를 싹쓸이하고 있다는 방송은 자못 충격적이다. 중국 어선과의 마찰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긴장을 늦추고 있는 사이 또 다른 적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진정 대를 위한 일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일부 관료와 승무원들의 근무 태만에 경악한 우리는 지금껏 열심히 일했던 해경들의 노고는 간 곳이 없다. 취업난이 어려운 요즘 해경에 지원하기 위해 준비했던 수험생들의 희망은 또 얼마나 허탈할까. 일부 몰지각한 사람으로 인해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

칸트가 말하는 순수이성과 판단력이 환경의 영향을 받아 감성이 불안전한 존재로 전이된 현상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다. “거리 속의 가까움”이 주는 퐁티의 철학이 상징계에서 출몰하는 인간의 욕망이 실재계의 단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는 일어나야 한다.

얼마 전 어느 행사에 나들이 간 적이 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얘기가 하나 같이 세월호의 여파로 요즘은 삶의 의욕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다가 대한민국 국민 모두 우울증에 걸려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하는 우려의 소리도 들린다. 상가나 행상하는 상인들도 요즘은 죽을 맛이란다. 상가 주인이 심심할까 봐 똥파리가 이 가게 저 가게를 휭휭 거리며 주인의 심심한 손을 빌리고 있는 모양이다.

예전과 달리 확성기가 우리의 침묵을 깰 줄이야. 며칠 전부터 시작되는 6·4 지방선거로 침묵하고 있던 소리가 기어 나오고 있다. 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던 4월의 그림자가 국민들을 우롱한 정치가들의 몰상식한 꼼수가 아니었다고 믿고 싶다. 요즘 거리에는 온통 아라비아 숫자에 가장 과학적이라는 한글 ‘-가, -나’를 새긴 옷을 입고 상가를 기웃거리던 똥파리처럼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많다. 때가 되면 나타나는 한 철 깜짝 쇼다. 인간이 연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번만큼 크게 작용한 적도 없을 것이다. 집단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보다 더 센 약발이 또 있을까.

대한민국은 지금 관피아만 척결할 문제가 아니다. 가장 위험한 인물은 바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선택하는 정치가요 선거권자인 바로 나 자신이다. 입으로는 사회가 어떠니 정치가가 어떠니 혈연이니 지역이니 하며 거품을 토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모순된 그 길을 택한다.

이 얼마나 오류를 범하고 있는 범죄자들인가. 얼마 후 치러질 자신이 찍은 한 표의 선택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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